세모… 「마음의 청소」를 하자/이은윤 특집부장(데스크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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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올해는 끔찍한 살인·강도사건,흉포한 폭력범죄,뜨거운 과소비·투기바람,뛰어오르는 물가고,정치판에 대한 냉소등이 어느때 보다도 심한 한해였다.
그래서 그런지 송년기분이 그저 허허성성할 따름이다.
허허롭기는 연초 1천5백원하던 설렁탕값이 2천5백원으로 올라 점심값을 낼 때마다 주머니속의 용돈이 마치 도둑이라도 맞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올해는 좀 나아지려니」하고 막연한 기대나마 했던 많은 주부들도 폭등하는 전세값,빚을 얻어서라도 대야 했던 비싼 과외비,1백72%나 오른 감자,1백45%나 오른 고등어 반찬을 사먹으면서 느낀 물가고 체감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실질소득이 매달 뚝뚝떨어지는 「월급도둑」을 이렇게 맞으면서도 용케 한해를 지냈으니 물질적으로는 그럭저럭 해탈경지의 「허허함」이라고 위안을 해본다.
그러나 한해를 보내는 이 시점의 우리 마음은 이러한 허허로움에 안주해 폭소를 터뜨리며 끝나가는 망년주나 한가히 마실만큼 편치가 못하다.
한소 수교다,남북교류다,북방호재다해서 좀 살맛을 돋울 듯 하던 북방정책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혈맹의 우방인 미국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우리가 보낸 특사에게 부시대통령 친서라는 형식의 「계산서」를 내밀었다.
때가 되면 여축없이 계산서를 내미는게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안으로는 사회도덕의 타락이 파탄의 지경에 이르는 굉음을 세밑까지 계속해 요란스럽게 냈다. 바로 어제만해도 전주교도소를 탈출한 탈옥수의 난동과 서울 한 나이트클럽 영업부장의 난자 피살사건이 많은 사람들의 분통을 터뜨리게 했다.
도대체 대통령까지 나서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마당인데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허구같은 현실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돈 20만원을 뺏으려고 사람을 파리잡듯이 무참히 죽여버린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양평 일가족생매장 살해사건은 이미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한 도덕성 파탄의 극치였다.
정말 큰 일이다. 감옥안에 갇혀 있는 폭력배가 사람을 놓아 판·검사를 협박하고 국회의원들은 그들을 내놓아달라고 석방탄원을 했다.
또 현직 판·검사가 폭력배와 버젓이 술자리를 같이해 권­폭 유착의 단면을 드러내보였다.
이러니 깡패도 아니고,국회의원도 아니고,판·검사도 아닌 보통사람들에게 세상사는 신명이 날리가 있겠는가.
정치판 역시 얼굴 찌푸려지는 파행과 몰염치가 횡행했다.
폭력배의 석방탄원을 낸 국회의원이 지역구 사무장에게 도장을 맡겨놓았었을 뿐 이라며 어물쩍 넘어갔다. 국회의원쯤 되는 지도층이면 도장이 찍힌데 대해 적으나마의 도덕적 책임은 질줄 알아야 했다.
법이 정한 정기국회 회기 조차도 「등원거부」로 3분의 2 이상을 허송하고 겨우 20여일 동안에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민생예산」을 허겁지겁 심의해 방망이를 쳐버렸다.
그러고도 밀렸던 세비는 다 타갔다니 그저 한심스러울 뿐이다.
「무노동 무임금」원칙이 정착되려면 등원거부 국회의원들의 「파업기간」동안 세비부터 주지말았어야 했다.
국회의원은 정기국회 회기에 출석안해도 월급을 주면서 어떻게 근로자들에게는 파업기간의 임금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소중한 속담이 있다.
정권의 정통성이 확립되지 않고 사회상층부의 모범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는 결코 사회 하층구조의 도덕성이 온전할리 없다.
연말을 기해 대폭 올린 공공요금의 경우만해도 그렇다. 정부는 공공요금을 두자리수로 올리면서 일반기업에는 임금과 제품값을 한자리수로 묶으라고 권유하면 과연 그말이 먹히겠는가.
정부는 민간기업이나 사회단체보다도 훨씬 높은데 있는 「윗물」이다.
지난 몇해동안 안올렸기 때문에 인상요인이 누적돼 불가피했다는 변명도 말이 안되는 소리다. 올릴 요인이 발생하면 그때그때 인상해서 소화해냈어야지 미루어 놓았다 가뜩이나 인플레 불안심리가 팽배한 시점에서 대폭 올린다는 것은 결국 「경제운용」을 잘못했다는 자인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치안이 이 지경이고 제조업부문인력이 서비스업부문으로 줄달음치고 있고 정치판이 계속 뒤틀리는 지경인데도 정부를,교도관을,경찰을,판·검사를 믿고 신바람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이같은 사회도덕의 파괴와 범죄만연은 90년 한햇동안에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도,해외에서 컨테이너로 수입한 것도 아니다.
탱크를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군사쿠데타와 민주화를 외치는 인사들을 마구 고문하고 치사까지 시킨 「힘의 통치」가 사회저변으로까지 번져 한몫 챙기려는 한탕주의와 인명경시의 폭력주의를 가속화시킨 요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은 국가 및 사회 각계 지도층의 도덕성과 규범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데서부터 비롯됐음을 되씹어 봐야한다.
그래도 충남대학에 평생모은 50억원을 선뜻 희사한 김밥할머니가 있었고 1천여가구의 아파트를 지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어준 청년실업가가 있었기에 「살맛」의 명맥을 가까스로 이어준 한해였다.
입맛 떨어지는 일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눈알을 샛별같이 똑똑히 뜨고 비록 또 속을지라도 「내년엔 좋아지려니」하고 살아야 한다.
내자식,내손자가 계속해 살아가야할 이 나라요,이 땅덩어리이기 때문에 희끗희끗해지는 머리에 검은 옻칠을 하고라도 또렷또렷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울분에 차서 망년주를 과음했다면 따끈한 칡차 한잔으로 삭이고 31일 자정까지는 모두가 심성의 때를 씻어내는 「마음의 청소」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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