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인생' 만지며 느끼세요…시각장애인 위한 전시 연 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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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세상이 나쁘지 않더라고요.

시각장애인 화가 김민솔(37)씨가 작품 ‘장미’를 소개하며 말했다. 시각장애인도 장밋빛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서울 관악구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S갤러리에서 지난 2일부터 오는 17일까지 열리는 전시회엔 장미를 비롯해 작품 25점이 걸렸다. 모두 손으로 만지며 감상할 수 있는 그림들이다. 시각장애인도 예술 작품을 느낄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가 담겼다.

시각장애인 화가 김민솔(37)씨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인 ‘장미’를 소개하는 모습. ‘장미빛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박종서 기자

시각장애인 화가 김민솔(37)씨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인 ‘장미’를 소개하는 모습. ‘장미빛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박종서 기자

김씨는 시력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1~6급까지 나눠진 등급 중 5급은 경증 시각장애에 속한다. 휴대전화 글씨를 확대하지 않으면 화면을 잘 읽을 수 없고, 사물의 형체가 뿌옇게 보이는 정도다. 먼 거리를 혼자 이동할 때는 흰색 지팡이에 의지해 집을 나선다.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 공간에 발을 헛디뎌 허벅지까지 빠진 적도 있어 항상 조심히 이동한다.

하지만 작업실에서 김씨는 완전히 자유롭다. 그림 그리기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그림을 그릴 땐 캔버스 위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것 같다”며 “내 마음을 보살필 수 있다”고 말했다.

미술로 자유로워지기 전까지 김씨 삶엔 굴곡이 많았다. 앞이 잘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달은 건 스무 살 때였다. 대학 미용학과에 진학한 김씨는 네일아트 실습을 하는 과정에서 손가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끼고 시력검사를 하러 안과를 찾았다가 “큰 병원에 가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6개월을 기다려 대학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베체트병(Behcet’s disease). 전신 혈관에 염증을 일으키는 병이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씨는 좌절했다. 이후 창문에 암막 커튼을 치고 세상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김씨는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게 싫었다”며 “당시엔 밤새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캄캄한 방에서 2년을 보낸 뒤에야 김씨는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김씨를 방에서 꺼낸 건 배움에 대한 열정이었다. 평소 미용·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김씨는 미국에서 패션을 공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대학 수업을 듣기 위해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영어학원에서 “눈이 안 보이면 인터넷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2012년 김씨는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에 입학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백내장이 악화해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이듬해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씨의 작품인 ‘두번째 봄’. 어둠 속에 피어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를 담았다. 박종서 기자

김씨의 작품인 ‘두번째 봄’. 어둠 속에 피어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를 담았다. 박종서 기자

김씨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15년이다. 대학교 미술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동생이 “언니가 그림 그리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생의 한 마디에 김씨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 뒷면엔 책에서 읽은 인상 깊은 글귀를 적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세밀하게 그림을 그리진 못했지만, 매일 그리고 또 그렸다.

초반 작품들은 다소 어두웠다. 김씨는 “처음엔 내 아픔을 담은 그림을 그렸지만 이젠 축제같이 화려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작은 선이 굵고 강렬한 색을 바탕으로 화사한 분위기를 띤다. 다른 시각장애인과 함께 작품을 공유할 수 있게 입체감도 가미한다.

김씨는 과거엔 어두운 그림을 그렸다. 김씨는 “처음엔 내 아픔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박종서 기자

김씨는 과거엔 어두운 그림을 그렸다. 김씨는 “처음엔 내 아픔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박종서 기자

화가로서 김씨의 목표는 시각장애인이 더 폭넓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김씨는 “올록볼록한 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구슬이나 점자를 활용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매일 성취할 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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