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총리서리께/송진혁(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노재봉 총리서리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개인적인 안부나 표경은 부득이 생략하겠습니다만 아직도 대학교수의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는 노총리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재상자리에 오르신 것은 종래 관념으로는 확실히 대단한 파격이요,그런만큼 노총리 개인으로서는 더 영광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아마 50대 평교수가 정부에 들어간지 2년도 채 안돼 총리로 기용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되고,이것은 이제 우리나라도 종래의 「의전용」「얼굴마담용」 총리가 아니라 실제 일하는 총리,일할 수 있는 총리로 간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노총리는 영광보다는 일에 대한 부담과 걱정을 더 많이 떠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부담감과 걱정은 노총리가 성실하면 할수록 더 하리라 생각되고 노총리 휘하의 장관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노총리나 장관들은 앞으로 일을 통해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정당하고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국민들한테 부단히 입증해 보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출세」라는 표현이 어색합니다만 요직자들은 누구나 자기 출세의 정당성을 일을 통해 실증해야 하지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다 저문 90년대말의 이 시점에서 노총리 내각이 무슨 일부터 해나가야 할까요.
벌써부터 물가를 잡아라,치안부터 확립하라는 등 주문이 쇄도하고 있고 할일은 산적해 있는줄 압니다만,어리석은 생각으로는 90년대를 새로 시작하는 계획과 목표를 세우는 일이 가장 급선무라고 봅니다. 90년대의 시작은 당연히 90년이지만 우리는 지난 1년간 90년대 출발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올해 90년은 한마디로 말해 누구도 재미없는 한해였습니다. 기업인도 재미없고,근로자도 재미가 없었으며,공무원도 풀이 죽었고,월급쟁이들도 신명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도시도 그렇고,농촌은 더 했습니다. 야가 재미없으면 여가 재미있을 법 한데 올해는 여도,야도 재미는 커녕 죽만 쑤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재미없고 신명안나는 대신 자리잡은게 무엇입니까. 퇴폐·향락·과소비·범죄·타락… 이런 것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각계각층이 다 불평만만 노기등등하고 불안과 냉소와 허무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이런 현상이 정부와 무관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굳이 새 연대의 시작이 아니더라도 정부라면 당연히 내놓아야 할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적 공감대위에 나라의 역량을 결집해 나갔던들 이렇게까지 재미없는 1년이 되었을리는 만무할 것입니다. 올해초 우리는 어떤 말을 했습니까. 새 연대의 시작이니,21세기의 문턱이니 하고 요란하게 떠들었고 연초 3당합당이 있을 무렵에는 구국의 결단이니,신사고니 하는 온갖 말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1년내내 우리는 새 연대를 맞는 계획도,21세기에 대한 준비도 볼 수 없었고 결단도,신사고도 보지 못했습니다.
국민적 역량을 모을 방향도,모두가 신명나게 뛸 목표설정도 없었 습니다. 대신 보게 된 것은 단타주의·한건주의·무계획성… 대충 이런 것들이었고,민주화개혁은 하는건지 마는건지,내각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매사가 흐리멍텅·오리무중,이런 현상입니다.
가령 범죄와의 전쟁에 누가 공감을 않겠습니까마는 지금까지는 뭘 했는지 이제와서 경찰에 무전기가 모자란다,전문인력이 모자란다,최신지문감식기가 없다 하는 것은 무슨 얘기입니까. 국민이 그런데 쓰는 돈을 마다할리 없을 것입니다. 그런 준비를 갖춘 후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아니겠습니까. 또 화성살인범을 잡는다고 경찰이 고문하고 은폐한 것이 연달아 들통났는데 이는 살인사건 해결이란 작은 것을 노리다가 공권력 신뢰실추라는 큰 것을 잃어버린 사대취소가 아니겠습니까.
발표때 박수받던 일이 주밀한 계획과 뒷심없이 추진되다가 정책자체에 대한 국민신뢰를 금가게 하고 때를 놓치거나 국민을 설득못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UR·추곡매입·민방·증권·실명제 등이 다 그런 예가 아니겠습니까.
취임초에 이런 거북한 얘기를 드리는 것이 본의가 아닙니다만 정부가 이처럼 목표도,면밀한 계획도 없어보이는 것이 올해를 가장 재미없는 해로 만든 중요한 한 원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노총리는 이제 91년을 90년대의 새로운 시작으로 잡아 나라에 방향과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정부가 중심을 잡도록 하는 일부터 추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사개편이 필요하고 좋은 것은 후임자가 반드시 전임자보다 유능하고 도덕성이 더 있어서가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내각이 제시할 새로운 90년대를 기다립니다.
지난 80년대에 장관을 지낸 모씨는 언젠가 『내가 5공정부에서 왜 장관을 지냈는지 후회스럽다』고 했다고 합니다. 과거 나쁜 정권에서도 유능한 인물들은 많았습니다만 나쁜 정권에 의해 발탁되고 결과적으로 나쁜 정권에 봉사하다보니 도매급으로 얼룩지고 때묻은 인물로 치부되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습니다. 따라서 공직자는,더욱이 고위공직자는 자기를 위해서도 봉직하는 정부가 좋은 정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노총리는 다행히 나쁜 과거와 무록하고 매사에 극히 성실한 분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전 사석에서 잠시 만났을때 즉석에서 수첩을 꺼내 남의 말을 메모하는 모습을 보고 아,정말 성실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6공정부가 좋은 정부가 되느냐,아니냐의 가장 큰 열쇠는 노대통령 자신이 갖고 있지만 이제 노총리도 큼직한 열쇠 하나를 갖게된 것이 분명합니다. 부디 좋은 정부를 만들어 나가십시오.<편집국장대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