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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리뷰] 리스트 '사랑의 꿈'·피아노 백혜선(EMI)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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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만큼 다양한 그림으로 펼쳐지는 음악도 없을 것이다. 연주자에 따라 매우 다른 맛을 내는 것은 음표로 그려낸 그림을 멀리서 보는지 또는 가까이서 보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겉만 화려하고 텅빈 음악이라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면, 주선율을 연주하면서 나머지 손가락은 눈에 띄지 않게 열심히 아르페지오(분산 화음)나 반복 패턴으로 넓은 공간을 채워 나가야 한다. 다채로운 몸짓의 때로는 서정성 넘치는 선율이 돋보이는가 하면 집요하게 몰아치는 소리 다발이 전면에 표출되기도 한다.

피아니스트 백혜선(38.서울대 교수.사진)씨는 '사랑의 꿈'이란 대중적인 타이틀을 내건 앨범에서 감추어진 선율을 부각하는 데 성공했다. 큰 곡선의 파도에서부터 그 위에서 터져나오는 작은 포말(泡沫)까지 원경(遠景)과 클로즈업을 쉴 새 없이 오가며 잔잔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리스트와 백혜선의 연주 스타일은 잘 어울린다. 2년 전 첫 아이의 출산을 석달 앞두고 감행한 전국 순회공연에서'파가니니 대연습곡'을 들고 나왔을 때 심상찮더니 지난 4월 둘째를 낳은 지 4개월 만에 이 곡의 레코딩에 도전했다. 어릴 때부터 갈고 닦은 자신의 주특기라고 해서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차갑고 무서운 기교의 과시로 점철된 것은 아니다. "기교 이면에 감춰진 내면 세계를 표현해 보고 싶었다"는 백씨의 말처럼 그의 리스트 연주는 의외로 따뜻한 모성애를 느끼게 한다. '파가니니 대연습곡'과'연주회용 연습곡'에선 포근함에다 안락함마저 묻어난다.

모래알처럼 흩어질 것만 같은 음표들이 그의 손끝에서 잘 엉겨붙는다. '숲 속의 속삭임''난장의 춤''탄식'등 묘사적인 표제를 지닌 곡뿐 아니라 '트레몰로''옥타브''아르페지오'등 손가락 훈련을 위한 '체조'같은 곡에서도 독특한 성격이 부각된다. 그래서 이 음반은 여러 편의 단편 소설을 엮은 소설집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파가니니 대연습곡'은 '건반 위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담았다는 작품이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현란한 기교 대신에 즉흥성의 여백마저 남겨두는 장점도 발휘해 조급하지 않고 한결 여유롭다.

보너스 CD에는 피아노 독주로 편곡한 브람스.모차르트.슈베르트.쇼팽.김대현의 자장가가 실려 있다. 리스트 앨범 출시에 즈음해 백씨는 8일 부산을 시작으로 서울(10일).대구(14일).전주(16일).천안(18일)으로 이어지는 전국 순회 독주회에 나선다.

글=이장직 음악전문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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