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대북 감시 패널 종료' 그래서였나…WP 공개한 러시아 문서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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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활용해 미국 주도 일극(一極) 체제의 막을 내리고, 서방 동맹을 약화시키는 등 지정학적 재편을 추진 중이라는 내용의 기밀 문건이 공개됐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지난달 유엔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활동을 중단시킨 것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외곽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화상 링크를 통해 내각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외곽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화상 링크를 통해 내각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러 기밀문서 "서방동맹 약화 위해 실질적 조치"

1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유럽의 한 정보기관을 통해 입수한 러시아의 2023 외교정책개념의 ‘기밀 부록 문건’ 내용을 공개했다. 러시아는 지난해 3월31일 새로운 외교정책개념을 발표했지만, 기밀 부록 문건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초 러시아 외무부가 공개한 ‘2023 외교정책개념’에는 “미국 등이 우크라이나 분쟁을 이용해 수년간 반(反) 러시아 정책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면서도 “러시아는 스스로를 서방의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서방에 대해 나쁜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며 유화적인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어 “서방은 대결 정책과 패권주의적 야망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극 체제의 복잡한 현실을 받아들이길 희망한다”는 정도의 제언만이 담겼다.

반면, WP가 확보한 기밀 부록에는 공식 문서와 달리 강경하고 직설적인 내용이 실렸다. 특히 “러시아는 서구 세계에 대한 위협”이라면서 “미국은 러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비우호적인 국가 연합을 이끌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 결과는 미래의 세계 질서 윤곽을 상당 부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WP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의 결과가 러시아를 포함한 권위주의 국가의 글로벌 영향력을 결정한다고 믿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러시아의 공격으로 무너진 우크라이나 체르니기우의 건물 잔해를 구조대원들이 치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7일(현지시간) 러시아의 공격으로 무너진 우크라이나 체르니기우의 건물 잔해를 구조대원들이 치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러시아는 자국에 비우호적인 국가 연합, 즉 미국과 서방동맹 약화를 위해 이들에 대한 접근 방식을 계속 조정해야 한다고도 명시했다. 이를 위해 ▶공격적인 정보 캠페인, ▶군사·정치, 경제, 무역, 정보심리 영역을 포괄하는 기타 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서방 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한 실질적 조치를 개발하기 위해, 이들 국가의 대외 정책에서 취약한 지점을 찾기 위한 매커니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WP "유엔 대북제재 감시패널 종료, 러의 전략"

WP는 러시아의 고위 외교관과 긴밀한 학자의 발언을 인용해 “러시아가 최근 북한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유엔 대북제재 감시 패널의 연장에 거부권을 행사해 14년 간의 협력을 끝낸 것 역시, 기밀 문서에 따른 작업이 이미 진행 중이라는 ‘명확한 신호’였다”고 전했다. 해당 학자는 “러시아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미국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중동·동북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을 거론했다.

러시아의 2023 외교정책개념과 기밀 부록 작성에 참여한 러시아 독립국가연합(CIS) 연구소의 블라디미르 자리힌 부소장이 지난해 2월 러시아 외무부에 제출한 제안서 내용은 한층 강경하다.

해당 제안서에는 “미국 내 고립주의 우익세력의 권력 장악을 계속 촉진하고, 중남미 국가의 불안정을 위해 극좌와 극단주의 세력이 부상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 내에서 미국의 경제적 압박에 불만을 가진 정당을 지지해 이들의 주권 회복을 도와야 한다고도 했다. 이어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도모 ▶이스라엘과 이란·시리아의 위기를 확대 ▶대만 문제로 미·중 갈등 고조 등의 정책 제안도 담겼다.

9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왼쪽 세 번째)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을 만나고 있다. EP=연합뉴스

9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왼쪽 세 번째)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을 만나고 있다. EP=연합뉴스

이에 대해 석유 재벌 출신의 러시아 반체제 인사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는 “러시아가 미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모든 일을 하려 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과제는 미국을 게임에서 몰아내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패배는 많은 국가들에 미국에 대한 도전을 유발해, 미국에 엄청난 부담 증가로 돌아올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추가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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