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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창드래곤’이 시끄러운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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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한국은행 총재 하면 으레 조용하고 점잖은 경제학자를 떠올린다. 실제로 교수 출신 총재 중에 그런 분이 많았고, 내부 승진 총재라 해도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은 자체가 ‘한은사(寺)’라고 불렸을 정도로 절간처럼 조용한 동네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한데 이창용 한은 총재에겐 이례적으로 ‘창드래곤’이란 재기발랄한 별명이 붙었다. 그런 지 꽤 됐다. 창드래곤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별명 ‘재드래곤’처럼 누리꾼의 호의가 담긴 애칭이다. 사실 이름에 한자 용(龍)을 쓰는 건 가수 지드래곤(본명 권지용)이지 이 총재도, 이 회장도 다른 한자를 써서 드래곤과는 아무 상관없다. 아무튼 그렇게 불린다.

과일 수입, 최저임금 차등 적용 등
논쟁 감수하고 ‘불편한 진실’ 언급
우리에겐 더 많은 쓴소리가 필요

이 총재에게 별명이 붙은 건 국민의 관심을 꽤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오는 21일로 취임 2주년이 되는 그가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우선 통화정책 운용 과정이 보다 투명해졌다. 총재로 부임한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2.0%포인트 올리면서 언론이 ‘K점도표’로 부르는 조건부 포워드 가이던스를 도입했다. 금통위원들이 생각하는 향후 3개월간의 정책금리 수준을 알려줬다. 미래의 금리정책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했던 한은의 전통에서 벗어났다.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한은이 시끄러워졌다는 점이다. 지금 한은은 더 이상 절간이 아니다. 이 총재 스스로 논쟁적인 현안에 개입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주 금통위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이 총재는 농산물 물가 상승을 통화·재정정책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고 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생산 감소를 재배면적 늘리고 재정을 투입해 가격 보조하는 정책으로는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수입도 검토해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를 ‘망언’으로 규정하고 “농업을 모르면 입을 다물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의 의중을 충실하게 담은 보고서도 잇따라 나왔다. 지난달 초 ‘돌봄 서비스 인력난·비용 부담 완화 방안’에선 외국인 노동자 활용과 최저임금 차등 적용 필요성을 제기했다. 민감한 사안을 정면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민주노총과 외국인 노동자 인권단체는 한은 앞에서 “반인권적 발상”이라며 비판 시위를 했다. 보고서 때문에 사회단체가 한은을 찾아와 시위를 벌인 건 한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지난해 11월 보고서엔 선택과 집중에 실패한 역대 정부의 균형발전 전략에 대한 반성을 담았다.

이 총재는 작심하고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겨냥하고 있다. 2년 전 취임사에서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한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한 이래, “재정당국과 통화당국의 단기 정책을 통해 (구조적 저성장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2023년 5월), “10년 넘게 중국 특수(特需)에 취해 우리 산업이 한 단계 더 높이 가야 할 시간을 놓쳤다”(2023년 7월), “높게 매달린 과일을 수확하려면 어려움이 수반된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올해 3월) 등의 쓴 소리를 이어 왔다. 그가 자주 거론하는 ‘높이 매달린 과일’ 비유에 공감한다. 이제 편하게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과일은 다 따먹었다. 높이 매달린 남은 과일을 따기 위해선 힘껏 도움닫기를 하고 온 힘을 다해 도약해도 겨우 닿을까 말까다. 시끄럽고 불편한 논쟁을 피하면 안 된다.

한국은행이 본연의 역할인 물가와 금융 안정에나 신경 쓸 일이지 웬 오지랖이냐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총재 취임사에 답이 있었다. 장기 저성장 위기에 몰린 우리 경제의 중장기적 도전을 생각할 때 한은의 책임이 통화정책의 테두리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야당에 힘을 실어준 총선 결과에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우리 경제의 골든타임이 끝나간다는 한은의 진단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겐 더 많은 ‘창드래곤’의 쓴 소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