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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반도체 여야 협치는 몽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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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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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녁 퇴근시간 기쿠요마치(菊陽町) 하라미즈역 플랫폼에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졸릴 정도로 한산했던 곳이다. 구마모토역 방향으로 가는 기차(신칸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TSMC(대만 반도체 회사)에 소재와 부품을 공급하는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도쿄일렉트론 등의 직원이다. 산업 현장에서 쓰는 안전모를 넣은 투명한 백팩을 멘 승객도 보인다.

#2 기쿠요마치 자치단체 사무실 직원들이 반도체 공장이나 이와 관련된 부품·장비 업체에서 일할 의향이 있는 사람을 찾는 전화를 열심히 돌린다. 기쿠요마치에 세워진 TSMC 반도체 공장에 약 400명의 근로자가 대만에서 파견됐다. 그들은 이 지역 다른 제조업체 근로자보다 약 30% 많은 보수를 받는다. 이 때문에 이곳의 다른 업체에서도 임금이 오르기 시작했다.

TSMC 들어선 구마모토현 활기
한국의 클러스터 조성은 제자리
초당적, 거국적 지원 조직 필요

#3 구마모토현의 다다미가 깔린 연회장. 출장 온 대만 TSMC 임직원들과 지역 상공회의소 간부들이 티셔츠와 열쇠고리 등의 기념품을 주고받기에 바쁘다. 스시 접시 옆으로 기린 맥주와 일본 청주가 담긴 잔이 놓인다. 건배사가 울려퍼진다. “우리가 벌어들일 돈을 위하여(To all the money we’re going to make).”

한국에서 총선이 치러진 지난 10일 뉴욕타임스 1면과 8면에 실린 기사의 현장 묘사 부분이다. 기사 제목은 ‘옛 반도체 챔피언이 다시 링에 오르다(Old chip champ re-enters ring)’. 두 달 전에 가동이 시작된 TSMC 기쿠요마치 공장에 일본 반도체 산업 부활의 가능성이 보인다는 내용이다. ‘TSMC 공장 주변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인다. 화학 소재 제조업체와 장비 제조사가 반도체 경제 덕을 보려고 열띤 경쟁을 벌인다. 소니·덴소·도요타 등의 반도체 의존 기업들은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에 대규모 투자로 호응한다’고 전한다.

일본 정부는 이 공장을 짓는 데 4760억 엔(약 4조2000억원)을 댔다. 직접 지원(보조금)이다. 현재 TSMC 두 번째 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본 정부가 7320억 엔을 내기로 했다. 기쿠요마치 TSMC 합작 1호 공장 건설 계획이 확정된 것은 2021년 6월이다. 이듬해 4월에 공사가 시작됐고, 지난 2월 초에 부분 가동에 돌입했다. 완전 가동 시점은 올해 말로 계획돼 있다. 한국만큼이나 인허가 행정 절차가 까다로운 일본에서 이례적인 속도다. 정부가 앞에서 일사천리로 걸림돌을 치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돈을 모아 세운 반도체 회사 ‘래피더스’는 홋카이도에 공장을 짓는다. 라틴어 ‘라피두스’는 신속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던 ‘빨리빨리’를 일본이 외친다.

‘명실상부한 반도체 초강대국을 이룩하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 81쪽 큰 글씨 제목이다. 아래에는 ‘실효적인 반도체 산업 지원 대책 마련’이 적혀 있다. 시설투자 세액 공제 확대, 전력·공업용수 등 인프라 신속 지원이 세부 사항이다. 지난달 15일 윤 대통령은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300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민간투자를 바탕으로 수도권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신규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 집권이 2년이 다 돼 간다. 뭐가 됐다는 얘기는 없고, 아직도 “하겠다”는 말뿐이다. 전기·용수 공급 방법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오롯이 대통령 책임은 아니다. 반도체산업 지원 법안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이해가 각기 다른 지방자치단체가 발목을 잡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야당 측도 함께하는 ‘거국적(초당적) 반도체 지원 조직’ 창설을 제안한다. 우선 윤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가 만나 반도체산업 정책을 논의하기 바란다.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순 없다. 부부가 싸워도 아이들 공부는 시켜야 한다. 형제 간 다툼으로 집이 엉망이 됐어도 누군가는 소를 키워야 한다. 예전 챔피언이 장갑을 끼고 링에 올랐다고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