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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시각각

세월호 10년, 기억공간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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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한 주 전만 해도 온 나라를 뒤덮었던 벚꽃이 어느새 졌다. 그 자리에 여린 새잎이 돋았다. 세상은 이제 온통 녹색이다. 이맘때 산야는 초록으로 푸르지만, 다 같은 녹색이 아니다. 아기 볼살처럼 투명한 연두가 있는가 하면 벌써 햇빛을 튕겨내며 반짝이는 발랄한 녹색도 있다. 겨울을 지나며 계절에 동화된 잿빛 상록도 보인다. 단색 수묵화가 단조롭지 않은 것처럼 녹색도 그 농담(濃淡)만으로 다채롭다. 지난 13일 이 녹색의 세례를 받으며 차를 달려 경기도 안산 ‘4·16 단원고 기억교실’에 닿았다.

단원고 2학년 교실 그대로 재현 

2021년 개장한 기억교실은 10년 전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이 희생된 단원고의 2학년 10개 교실과 교무실을 그대로 재현했다. 칠판과 책상, 문짝과 게시판까지 그대로 가져온 이곳에서 아이들의 시간은 10년 전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에 멈춰 있었다. 책상마다 기억노트 한 권, 캐리커처와 기억패 하나, 그리고 유족과 방문객이 남긴 메모와 꽃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간 3만여 명이 다녀갔다. 10주년을 맞아 올해는 찾는 발길이 좀 더 늘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일주일 앞둔 9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4.16기억교실 모습. 2021년 문을 연 기억교실은 세월호 참사로 250명의 학생과 11명의 교사가 희생된 안산 단원고 2학년 교실 10개와 교무실 1곳을 그대로 옮겨와 재현했다. 연합뉴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일주일 앞둔 9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4.16기억교실 모습. 2021년 문을 연 기억교실은 세월호 참사로 250명의 학생과 11명의 교사가 희생된 안산 단원고 2학년 교실 10개와 교무실 1곳을 그대로 옮겨와 재현했다. 연합뉴스

사진과 캐리커처, 기념패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싱그러웠다. 그러나 초록들이 다 같은 녹색이 아니듯 그 풋풋함 속에서도 개성들이 뚜렷했다. 셰프 복장 인형과 경찰관 제복처럼 아이들의 다양한 꿈을 기억하며 친지들이 가져온 소품도 눈에 띄었다. 이 책상들을 하나씩 지나며 먹먹한 마음이 눈가에서 물기로 변한다. 티슈나 손수건 필수지참이다.

기억의 의지를 다지는 기억 공간

교실을 둘러본 방문객들은 저마다 노란 메모지에 글을 남겼다. 특이하게도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는 문구가 빠지지 않았다. 기억은 희생자들의 안타까움과 사고의 참혹함에 그치지 않는다. 안전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각성과 안전이 침해받아선 안 된다는 다짐이 단단히 뭉쳐 있다. 생중계 화면을 보면서도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떠나보낸 미안함과 근본적인 책임 소재를 묻는 의구심도 녹아 있다. 이날 목포에서 찾아온 단체 방문객에게 기억교실을 안내한 유가족은 “기억은 마음을 모으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인 마음엔 지키려는 힘이 있다.

유족들이 지킨 기억공간 여럿
방문객들은 안전과 기억 다짐
생명안전공원 건립도 서둘러야

벌써 10년. 이 시간 동안 유가족들은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붙들기 위해 필사의 몸부림을 쳤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특별법을 만들고, 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특별조사위원회를 지켜봤다. 일부에서 지겹다, 그만하자 소리쳤지만 굴하지 않았다. 스스로 여러 추념 사업을 벌이고 노란 리본 같은 기억의 상징물을 배포하며 추모의 공간을 만들었다. 단원고 기억교실을 비롯해 팽목항과 제주의 기억관, 서울시 의회 옆 기억공간, 목포 신항만의 세월호 선체까지. 유족과 자원봉사자들이 아픔을 추스르며 지켜낸 공간에 시민들이 찾아와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다잡고 돌아간다. 이제 시민을 지키지 못한 정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8년이 지나 발생한 이태원 참사가 대표적이다.

계속 미뤄지는 생명안전공원

지난 2021년 열린 4.16 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된 이손건축의 설계도. 당초 9962㎡ 부지에 495억원을 투입해 봉안시설과 교육, 활동 공간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건립해 세월호 10주기에 맞춰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협의기간이 길어지며 아직 착공도 하지 못한 상태다. 사진 안산시청

지난 2021년 열린 4.16 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된 이손건축의 설계도. 당초 9962㎡ 부지에 495억원을 투입해 봉안시설과 교육, 활동 공간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건립해 세월호 10주기에 맞춰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협의기간이 길어지며 아직 착공도 하지 못한 상태다. 사진 안산시청

예정대로라면 10주기를 맞는 올해 세월호 추념 행사에서는 기억공간의 결정판이 공개될 예정이었다. 정부와 지자체, 유가족들은 2019년 단원고 건너편 화랑유원지에 495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9962㎡의 추모공간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희생자 유골이 봉안되는 공간과 안전과 재난에 대비하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어우러지게 할 계획이었다. 뉴욕 9·11 메모리얼 파크의 한국판인 셈이다. 당초 2021년 착공해 10주년 기념식에 개장한다는 목표였다. 그런데 사업비 협의 과정이 늘어지면서 착공이 계속 지연됐다. 그러는 사이 건축비가 급상승해 총비용이 500억원을 넘길 상황에 처했다. 기재부는 지난해 규정상 사업비 적정성 재검토가 필요하다며 또 제동을 걸었다. 6개월의 검토를 거쳐 사업비는 508억원으로 늘리고, 대신 연면적을 20%가량 줄이는 선에서 합의를 봤다. 이래저래 올해 완공은 고사하고 첫 삽도 뜨지 못한 상태다. 설마 정부가 기억공간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