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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이제는 타협과 협력의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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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한국사회는 수렁에 빠져있다. 심한 분열과 갈등과 불신, 미래에 대한 불안, 집단이기주의, 유착과 담합을 통한 기득권 방어가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됐다. 양극화는 심해졌고, 흙수저·금수저란 말이 상징하듯 계층 간 사다리는 좁혀져 있다. 과거의 역동성이 사라지며 이미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세계 평균 성장률을 밑돈 지 오래다. 그러나 정치는 이에 대한 바른 진단과 대책을 내놓기보다 분열과 증오를 증폭시키며 증세를 악화시켜 왔다. 그 결과 한국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사회, 정체사회가 되어있다.

5년마다 바뀌는 단임 정권은 한국사회 전반의 시계(視界)를 단기화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요 공직자뿐 아니라, 공공기관장, 각종 단체장, 대주주 없는 금융기관장, 심지어 장기적 안목으로 국가정책을 연구해야 할 국책연구원장들도 따라 바뀌게 된다. 국가의 지도층에서부터 짧은 임기 내에 그들의 사적 목표를 우선시하며 단기적 포퓰리즘, 장기적이며 구조적인 문제들의 방치, 도덕적 해이가 깊이 퍼져있다.

한국 사회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어
사회 전반적 개혁 없이는 못 벗어나
국가 지배구조, 정치질서 바뀌어야
대화·타협 통한 변화가 총선의 민의

한국 사회, 경제, 정치가 안고 있는 오늘의 문제는 갑자기 이 땅에 뚝 떨어져 생겨난 문제들은 물론 아니다. 근대화와 압축성장 과정에서 정부가 도입해 온 제도와 정책이 한국인의 행동양식, 문화, 관행, 국내외 환경의 변화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오늘날의 현상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 국가와 사회는 늘 연속선을 그리며 변화, 발전한다. 지난 60년간의 한국 경제는 그 상승의 기울기와 하강의 기울기 모두 과거 산업혁명 이후 어떤 선진국이 그려온 상승과 하강의 모습보다 가파르다. 제도와 정책, 그리고 이의 운영방식이 국가의 영고성쇠를 결정한다. 향후의 기울기는 지금 우리가 어떤 제도와 정책을 도입하며 국가사회의 전통과 기풍을 만들어 갈 것인지에 달려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제도에 대한 논의가 있어도 이것이 정치과정을 통해 입법화되고 도입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한 정치과정은 결국 국가의 권력구조, 정당 문화, 언론, 시민의식에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의 정치와 제도, 정책이 지금과 같이 지속되면 한국의 병은 더 깊어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그 뿌리들이 매우 깊고 서로 연결되어 있어 종합적 접근과 처방을 필요로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해온 보상과 유인체계는 더 이상 역동적이며 건강한 한국의 미래를 열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 관료 시스템이 흔들리고, 인재의 흐름과 국가자원의 배분이 왜곡되며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 있다. 지금 이 시대 상황에 맞게 근본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사법 전반에 걸친 대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국민의 인식이 이번 총선에서도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위기의식,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혁신을 이룰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정치문화와 국가지배구조의 개편이 불가결하다. 여, 야, 진보, 보수 진영 간의 극한적 대립 방식, 상대방이 하는 일을 어떻게든 반대하고 끌어내려야 내게 기회가 오는 정치구조를 가지고는 제대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과 혁신을 추진해 나갈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한계가 많은 제도이다. 그것이 생산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타협과 협력의 문화가 필수적이다. 우리 정치는 이제 1987년 민주화 이후 지난 37년간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그러한 성찰 위에서 오늘을 바꾸고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여야가, 보수와 진보 진영이 서로 건강한 대립을 지속하되 미래를 위한 큰 틀에서 대화하고 협력하며 국가과제를 개혁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너무 크고, 그 결과가 두렵다. 나라와 국민을 잘되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정당의 정체성이 무엇이 있는가? 영남과 호남,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의 갈래로 나누어지고 언론은 이러한 진영 간 분열을 부추기는 상황이 지속되지 않도록 국민의 지혜를 모으고 화해를 얘기해야 한다. 정치가, 국민이, 타협과 협력의 문화와 전통을 세우지 않고는 아무런 문제도 제대로 해결해 나가기 어렵다는 것이 민주화 이후의 교훈이다. 위기를 겪고 외압에 의해서야 겨우 부분적 개혁을 하는 위기의존형 국가가 될 뿐이다.

이번 총선 민의에 나타났듯이 국정운영의 일방독주, 비타협의 정치로부터 벗어나 여야가 진지한 대화와 타협, 협력으로 미래를 위한 변화를 이루어내기 바란다. 22대 국회 의석의 분포도 정부 여당과 야당 간 설득, 타협, 협력 없이는 어떤 개혁과 변화도 이뤄낼 수 없음을 말해준다. 점점 조선 시대 당파싸움으로 돌아간 것 같은 오늘의 정치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 새로 구성될 22대 국회는 여야가 타협과 협력의 문화를 만들어가면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헌을 통한 새로운 국가지배구조와 정치 질서를 모색해 나가길 기대한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