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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고달픈 주인의 국회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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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선거가 끝나서 기쁜 점은 조용해졌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후보들이 보내는 문자메시지의 무차별 공격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무엇을 하겠다는 공약이라면 가치가 있었을 텐데, 심지어 대놓고 ‘거짓선동으로부터 ○○후보를 지켜달라’는 문자도 있었다. 선거는 나를 대신해서 일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인데 오히려 유권자인 내가 누구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다니, 누가 누구의 공복인지 앞뒤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것이다.

총선 끝난 지금부터 시민 참여 절실
통합 위한 낙관적 편향이 필요한 때
새 국회에 토론의 규칙부터 요구를
미래세대 대변 청년 정치인 키워야

선거 기간 동안 정치에 오만정이 떨어졌어도, 시민의 관심이 진짜 필요한 것은 새 국회 출범을 앞둔 이제부터다. 시급히 착수해야 하는 환경, 교육, 연금, 노동 영역의 개혁 과제들은 장기적으로 미래세대의 삶을 크게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뒤에 올 세대들이 맞부딪칠 세상을 소수의 정치공학적인 이해득실 계산에 희생시킬 수는 없다. 종업원이 마음에 놓이지 않으면 사장이 바쁠 수밖에 없듯 주인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고달픈 법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처럼 인종이나 종교, 언어와 같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더 뿌리 깊은 갈등 요인을 가진 것도 아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망국병이라 여겼던 영남과 호남의 갈등도 많이 옅어졌다. 보복의 악순환으로 공고해진 정치적 양극화가 ‘넘사벽’으로 여겨지지만, 비관하고 포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지금은 우리가 통합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낙관적 편향이 억지로라도 필요한 순간이다.

통합을 위한 만병통치약이 있을 수 없고, 통합이 어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통합이라는 거대한 단어 앞에서 한없이 사소하고 미미해 보이더라도 포용과 합의의 가치를 담은 작은 실행들을 사부작사부작 쌓아가는 것만이 미래세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집단 간의 협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관찰한 연구는 몇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갖는 사람들끼리, 구체적 목표를 공유한 상태에서, 자주 상호작용을 할 때, 그리고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의 만남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는 규범이 생기고 이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 협력이 촉진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4년간 주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끊임없이 통합의 시도들을 응원하고 요구하는 일이다.

우선 22대 국회에 토론다운 토론의 선례를 보여줄 것을 요청한다. 국회는 규칙을 만드는 기관인 만큼 우선 국회부터 발언과 표현, 토론의 규칙부터 제발 좀 만드시라. 정해진 형식과 규범이 없는 토론은 말다툼이지 토론이라 부를 수도 없다. 제대로 된 토론이 없다면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진다.

수많은 공청회나 국무위원과의 질의응답 등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시시각각 중계되는데, 이는 논쟁적인 이슈의 쟁점을 파악하고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우는 시민성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나쁜 선례의 반복은 오히려 시민성에 해악을 끼치기만 한다. 말꼬투리 잡기, 상대의 발언을 맥락에서 분리하여 침소봉대하기, 고정된 프레임 씌우기와 같은 자극적인 언어선동은 다양한 미디어를 타고 더 크게 증폭된다.

그리고 정치 엘리트들의 말하기는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거대한 내러티브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언론은 갈등을 먹고 사는 것이 생리라지만, 양질의 토론과 협력적 시도들이 충분히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시민들이 언론과 국회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비판적 반응을 보이고 압력을 넣어야 한다.

또 하나, 정당법 개정을 서둘러서 청년정치인을 늘리는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만들기 바란다. 정당 내 다양성의 확보는 정치적 양극화의 폐해를 보완하는 하나의 대안이다. OECD 국가 중 한국은 40세 이하 청년 의원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다. 인구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해 6070이 2030보다 많은 이른바‘ 그레이 선거구’는 앞으로 더욱 증가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재선 가능성에만 온 신경이 갈 수밖에 없는 국회의원들은 노년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이슈들만 주로 다룰 수 밖에 없다.

선거 때마다 일회성 이벤트처럼 이루어지는 청년 인재영입에 청년을 소진하지 말고, 정당법 개정을 통해 젊은 정치인의 교육과 국회 진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 더 많은 젊은 정치인의 등장은 산업화 세대 가치와 민주화 세대 가치 간의 상호 대결 구도를 넘어서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문자 폭탄은 유권자가 지닌 양질의 무기가 된다. 상대편 말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통합의 가치에 반하는 정치를 했을 때 비난의 문자 폭탄을 보내고, 상대가 통합적인 행보를 보였을 때 지지의 문자 폭탄을 보내는 시민운동을 펼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이러나저러나, 주인은 고달프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