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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홀로 서 있는 ‘원주로’ 표지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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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강태화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미국 버지니아주 남부 도시 로아노크. 한글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원주로’였다. 1964년 원주와 자매결연을 한 로아노크시가 1982년 220번 도로 500m 구간에 명명한 곳이다. 원주 시청 앞에도 ‘로아노크 사거리’가 있다.

미국은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이다. 한국인들은 71주년을 맞은 한·미 동맹 앞에 자연스럽게 ‘철통같은(iron clad)’이란 말을 붙인다. 그러면서 동맹은 당연하다고 믿는다. 시민들이 매일 지나다니는 로아노크 사거리처럼 말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로아노크시에 있는 ‘원주로’. 1964년 원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220번 도로를 원주로로 명명했다. 강태화 기자

미국 버지니아주 로아노크시에 있는 ‘원주로’. 1964년 원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220번 도로를 원주로로 명명했다. 강태화 기자

트럼프 1기 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던 존 볼턴으로부터 당연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한반도 정책의 목표는 한반도 통일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는 분단 상황에 대해선 “일시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헌법 4조에 명시돼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헌법 4조가 당연하지 않게 됐다. 정권에 따라 통일의 대상인 북한에 대한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세 차례 김정은을 만났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그를 잘 아는 인사들은 트럼프 재집권 시 김정은과의 협상이 재개될 거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트럼프의 새 설계도에선 ‘운전자’를 자처했던 한국의 역할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한반도 핵 정책을 총괄했던 리처드 롤리스 전 국방부 아시아·태평양안보담당 부차관은 “한국은 참관자(observer)로 협상장 옆자리(side saddle)에 앉게 될 것”이라며 “한국의 발언권은 있겠지만, 거부권을 행사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북한 주민에게 김정은과 뭘 합의하려는지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북한 주민도 그런 이상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 대북 선제공격을 주장한 적이 있는 볼턴에게 “그럼 전쟁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피했다. 대신 “북한 주민에 적대감을 추구하지 않고 정권을 압박해야 하는데, (한국 정부가) 제재를 위반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방치해 왔다”고 답했다.

2012년 원주시는 주민 조사를 통해 자매결연의 상징이던 ‘로아노크 광장’을 폐쇄했다. “자매도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주민 상당수는 광장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고 답했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공기처럼 당연해진 결과다. 그러나 외교에서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를 둘러싼 공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