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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여진 300여회..."산속에 1000명 이상 고립" [지진 현장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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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전날 7.2 규모 지진으로 크게 기운 화롄시 쉬안위안루(軒轅路)의 톈왕싱(天王星) 빌딩에 포크레인과 기중기가 동원돼 건물 진단과 철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화롄=신경진 기자

4일 전날 7.2 규모 지진으로 크게 기운 화롄시 쉬안위안루(軒轅路)의 톈왕싱(天王星) 빌딩에 포크레인과 기중기가 동원돼 건물 진단과 철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화롄=신경진 기자

4일 오전 11시 10분(현지시간) 대만 화롄(花蓮)현에 위치한 허런(和仁)역. 수도 타이베이에서 출발한 열차가 화롄시에서 40여㎞ 떨어진 이 역 근처에서 갑자기 정차했다. 그 사이 열차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무섭다”고 외치는 승객의 목소리도 들렸다. 다급하게 울리는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니 규모 4.0의 여진이 발생했다는 경고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전날 발생한 지진으로 산사태가 난 철길 옆 산에서도 곳곳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지난 3일 규모 7.2의 강진이 25년만에 발생한 대만 화롄에서는 크고작은 여진이 4일 오전까지 300회 이상 이어졌다. 대만 중앙재해대응센터에 따르면 이날 오후 4시 30분 기준 대만 전역에서 이번 강진으로 인해 사망자 10명, 부상자 1067명이 발생했다. 지진으로 인해 고립됐거나 실종된 사람은 688명이다. 사망자는 모두 지진 피해가 집중된 화롄현에서 나왔다. 유명 관광지인 타이루거(太魯閣)국가공원에서 4명, 쑤화고속도로 주차장에서 1명, 다칭수이터널 휴게구역에서 2명, 광산 지역에서 1명, 화롄시 시내 건물에서 1명 등이다.

화롄시에서 숨진 이는 전날 지진으로 심하게 기운 9층 높이의 톈왕싱(天王星) 빌딩에 있던 30대 여교사 캉(康)이다. 캉(康)은 건물에서 소방관에 의해 구조됐다가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를 구하려 다시 건물에 들어갔다 여진에 따른 추가 붕괴로 변을 당했다.

이날 기자가 찾은 톈왕싱 빌딩에는 포크레인 두 대가 철거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폴리스라인 옆에 설치된 미디어센터 천막에선 화롄시 관계자가 내외신 기자의 취재 편의를 도왔다. 현장에서 만난 우쿤루(吳昆儒) 화롄현 행정처장은 “톈왕싱 빌딩은 법리적 검토를 위한 구조 조사를 마치는대로 철거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만 당국은 이날 앞으로 2~3일가량 여진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예보했다. 타이루거국가공원 측은 여행객과 직원 등 최소 1000명 이상이 산속에 고립됐다고 추산했다. 지진 당시 공원 안에서 묵은 직원·여행객 654명과 당일 입산자를 합한 숫자다.

4일 화롄 베이빈제(北濱街)에 전날 지진으로 파손된 차량이 방치되어 있다. 차량에는 “촬영은 자유이지만 차주에게 도움을 부탁한다”고 쓰인 저금통이 놓여있다. 화롄=신경진 기자

4일 화롄 베이빈제(北濱街)에 전날 지진으로 파손된 차량이 방치되어 있다. 차량에는 “촬영은 자유이지만 차주에게 도움을 부탁한다”고 쓰인 저금통이 놓여있다. 화롄=신경진 기자

화롄시 일대엔 지진의 혼란상이 여전했다. 피해가 컸던 베이빈(北濱)거리엔 지진에 떨어진 옥상 벽돌에 완파된 차량도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차량에는 “촬영은 자유지만 차주에게 도움을 부탁한다”고 쓰인 저금통이 놓여 있었다.

시민들은 당시의 공포를 전했다. 주민 웨이(衛)는 전날 지진 당시를 떠올리며 “죽겠구나 싶어 단숨에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고 말했다. 한국 교민 정주호(29)씨는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잠이 깼다”며 “평소 훈련대로 운동장에 300~400여명의 학생과 대피해 대기했는데 여진 때마다 여학생들이 지르던 비명소리가 생생하다”고 말했다. 현지 가이드 쉬(許)는 “화롄 사람이 도망칠 정도의 지진이면 대만 사람 모두 도망가야 할 지진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지진에 이력이 났지만 어제는 공포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대만 화롄현에서 3일 발생한 강진으로 화롄시 다칭수이 터널을 잇는 다리가 끊어져 있다. 신화=연합뉴스

대만 화롄현에서 3일 발생한 강진으로 화롄시 다칭수이 터널을 잇는 다리가 끊어져 있다. 신화=연합뉴스

교통도 마비된 상황이다. 대만 중시신문망은 “화롄 지역은 ‘외딴 섬’이 됐다”고 전했다. 외부로 통하는 주요 다리가 지진으로 인해 거의 다 끊겼기 때문이다. 화롄현 쑤화고속도로의 다칭수이 터널은 20m 길이의 샤칭수이 다리가 통째로 무너져 사라졌다. 여진으로 인해 복구 작업이 지연되면서 10일에야 임시 다리가 개통될 전망이다. 대만 교통부 도로국은 5월 말까지는 소형 차량만 다리 위를 지나갈 수 있고, 연말에서야 완전한 다리 복구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타이베이에서 화롄으로 향하는 기차만 이날 오전부터 운행이 재개됐다.

다만 이번 지진의 파괴력이 '원자폭탄 32개를 한꺼번에 터뜨린 수준'임에도 2400여명이 목숨을 잃은 지난 1999년 921 대지진과 비교하면 인명피해는 우려했던 것보다 적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921 지진 이후 대만 당국은 보다 엄격한 건설 규제를 지시했고, 이러한 노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상자 수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WP는 대만 당국이 2019년부터 1999년 이전에 지어진 전국의 건물 3만6000채에 대한 대대적 점검 작업을 실시하고, 이들 건물의 내진 성능을 개선하는 데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건물 재정비에도 나섰다고 전했다. 우쿤루 처장은 “화롄은 필리핀 지각판과 유라시아 지각판이 맞물리는 지진대에 위치해 평소 지진 대비에 만전을 기했기에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말했다. 화롄현 건축가 협회에서 자원봉사를 나온 리야오성(李耀昇) 건축사도 “이번 지진엔 빠른 대피가 이뤄져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만 정부는 피해 복구 지원에 나섰다. 천젠런(陳建仁) 행정원장은 이날 화롄 지역을 시찰하면서 3억 대만달러(약 126억원)를 긴급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다음달 20일 총통에 취임하는 라이칭더(賴淸德) 당선인은 당 회의를 취소하고 화롄을 방문했다. 기업들의 기부도 이어지고 있다. 아이폰을 조립하는 애플 협력업체 폭스콘이 8000만 대만달러(약 34억원)를 내놨고, 폭스콘 창업자 궈타이밍(郭台銘)이 자신이 만든 융링(永齡)기금회를 통해 6000만 대만달러(약 25억원) 기부에 나서기로 했다.

한편 대만 정부는 중국 정부가 “구호 지원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에 대해 “실종자 수색 인력이 충분하다. 본토가 우릴 도울 필요는 없다”며 거절했다. 반면 일본의 지원 의사에 대해선 “대만과 일본 사이에는 진실한 우정이 있다”며 감사의 뜻을 밝혔다. 한국 외교부는 4일 "사망한 희생자들과 유가족, 부상자들에게 깊은 위로의 뜻을 표한다"며 "재난 구조와 피해 복구를 위해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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