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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굴복않겠다" 의료개혁 정면돌파…용산 "2000명 절대수치 아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윤석열 대통령은 1일 의·정 대립의 핵심 쟁점인 의대 정원 2000명 확대에 대해 “2000명은 그냥 나온 숫자가 아니다”며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고 말했다. 임박한 4·10 총선과 맞물려 의대 증원 규모에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여권 내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에서도 원칙에 따른 대응을 고수한 것이다. 다만 윤 대통령은 의료계가 “더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고 대화의 문은 열어뒀다. 대통령실은 담화 내용 중 대부분을 차지한 윤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만이 주로 부각되자 “2000명은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다. 2000이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을 것”(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라며 뒤늦게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1일 오전 11시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룸에 선 윤 대통령은 51분 1만4000여자 대국민 담화를 통해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을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취임 후 세 번째 대국민담화였다.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담화에서 윤 대통령은 먼저 “국민의 불편을 조속히 해소해드리지 못해 늘 송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의·정 충돌이 불거진 후 첫 사과 표현”이라는 게 대통령실의 설명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청사에서 '국민께 드리는 말씀'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청사에서 '국민께 드리는 말씀'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대통령실

이후엔 강공 모드였다. 윤 대통령은 “제대로 된 논리와 근거도 없이 힘으로 부딪혀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시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심지어 총선에 개입하겠다며 정부를 위협하고, 정권 퇴진을 운운하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대통령인 저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담화에서 의료 개혁의 추진 근거와 당위성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윤 대통령은 "의대 정원 증원 2000명은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정부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 증원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 인력 수급 추계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 등을 구체적 수치로 들어가며 "어떤 연구 방법론에 의하더라도 지금부터 10년 후인 2035년에는 최소 1만명 이상 의사가 부족하다는 결론은 동일하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외국과 비교해 우리나라 의사 수가 크게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향후 10∼20년이 지나면 영국·프랑스·독일·일본의 의사 수와 우리나라 의사 수의 격차는 훨씬 더 벌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이날 대국민담화에서 가장 많이 쓴 단어는 국민(68회)이었다. 이어 증원(46회), 논의(23회), 개혁(19회), 협의(18회), 정책(17회), 생명(14번) 순이었다.

특히 ‘굴복’이란 단어를 네 차례 사용했다. 2000년 의약분업 당시 “의사단체의 요구에 굴복해서, 이해집단의 위협에 굴복해서 지금 심각한 의사 부족 사태를 초래한 것”이라며 “이해집단의 저항에 굴복한다면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 여러분께서 저를 불러내셔서 이 자리에 세워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잘 알고 있다”며 “국민의 보편적 이익에 반하는 기득권 카르텔과 타협하고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화물연대 집단 운송 거부 대응, 건설 현장 '건폭' 개혁, 원전 생태계 복원 등 이익단체의 반발에도 굴하지 않고 정면 돌파했던 정책을 일일이 거론했다. “노조 단체와 지지 세력들은 정권 퇴진과 탄핵을 외치며 저항했지만, 만약 그때 물러섰더라면 결국 국민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갔을 것”이라고도 했다.

의대 증원과 관련한 여러 반론에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의료계 협의에 대해 “이를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한 논의를 거쳤다”며 정부가 37차례 협의했다는 점을 날짜까지 예시했다. 2000명 증원 불가론에 대해선 “인제 와서 근거도 없이 350명, 500명, 1000명 등 중구난방으로 여러 숫자를 던지고, 그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500명에서 1000명을 줄여야 한다고 으름장도 놓고 있다”고 했다. 단계적 증원론에 대해서도 “애초에 점진적인 증원이 가능했다면, 어째서 지난 27년 동안 어떤 정부도, 단 한 명의 증원도 하지 못한 것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청사에서 '국민께 드리는 말씀'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청사에서 '국민께 드리는 말씀'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 대통령은 “지난 27년 동안, 국민의 90%가 찬성하는 의사 증원과 의료 개혁을 그 어떤 정권도 해내지 못했다”며 “역대 정부들이 9번 싸워 9번 모두 졌고, 의사들의 직역 카르텔은 갈수록 더욱 공고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윤 대통령은 “역대 어느 정부도 정치적 유불리 셈법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이렇게 방치됐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위기”라며 “제가 정치적 득실을 따질 줄 몰라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 고질적 문제를 개혁하는 것이 바로 국민이 선출한 정부의 역할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조정의 여지는 열어뒀다. 윤 대통령은 의료계를 향해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며 “의료계가 증원 규모를 2000명에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집단행동이 아니라 확실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통일된 안을 정부에 제시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간 대통령실은 2000명 증원에 대해 “불가역적”이란 입장을 고수해왔는데 ‘합리적인 통일된 안’이란 조건을 달긴 했지만, 윤 대통령이 정원 조정을 시사한 것은 처음이다. 이와 관련,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이날 저녁 KBS ‘뉴스 7’에 출연해 “이해관계자들이 반발한다고 1500명 1700명 이렇게 근거 없이 바꿀 수는 없다”면서도 “정부는 2000이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의대 증원 규모를 포함해서 더 좋은 의견과 합리적인 근거가 제시된다면 정부 정책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담화 마무리에 다시 한번 의료 개혁에 힘을 실어줄 것을 호소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가 국민을 위한 의료 개혁을 반드시 완수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의 성원과 지지를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저와 정부는 더욱 자세를 낮추고 우리 사회의 약자와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지역 2차 병원인 대전 유성선병원을 깜짝 방문했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의료계와 대화를 하려고 했으나 개원의, 전공의, 교수 등 의사단체가 각 분야로 나누어져 대화가 쉽지 않았다”며 “정부가 무엇을 지원해야 하는지 기탄없이 말씀해 달라”고 말했다. 이어 의료진의 여러 건의를 들은 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의료 개혁은 대의와 원칙만 가지고는 안 되고, 디테일에서 승부가 결정된다”며 “의료정책 담당인 보건복지부 서기관, 사무관들이 의료기관에 가서 실제로 행정 근무를 해 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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