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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르피가로지 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셰바르드나제의 사임은 개혁정책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모호한 태도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민주화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독재라는 모순된 처방을 제시했다. 그러나 셰바르드나제는 사임이란 극단적 방법을 통해 독재의 부활 가능성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냄으로써 고르바초프 자신이 스스로의 모순에 대해 책임질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임은 지난 몇 주일 전부터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소련정치권의 병세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통제불능의 난국 앞에서 당황하고있는 고르바초프는 강권통치로의 회귀를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있다. 고삐를 단단히 죌 필요가 있다는 말을 거듭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모든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독재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자신이 독재자로서의 소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서를 되찾게 해줄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는 국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스탈린 식의 피비린내 나는 전제주의와 오늘날의 무정부상대라는 양극단의 중간쯤을 꿈꾸고 있으며 러시아 역사는 그 전례를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제정러시아의 황제인 알렉산더 2세는 자신이 추진하던 개혁정책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내각에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는 이른바「애정의 독재」를 실천했었다.
난국타개를 위해 자신이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한다는 고르바초프의 생각은 오늘의 소련현실에 비추어 물론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진정한 문제가 해결되는건 아니라는데 진짜문제가 있다.
오늘날 소련이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된 첫 번째 책임은 그에게 있다. 좌에서 우로 급선회하고 또 두 발짝 뒤로 물러나기 위해 겨우 한 발짝을 앞으로 내뻗는 바람에 그는 스스로 지금과 같은 난관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그는 소련사회의 기존체제를 개선하려고만 했지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공산주의의 고사가 아니라 재생인 것이다.
셰바르드나제의 사임이 페레스트로이카의 종말이 시작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고르바초프의 이중성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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