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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가 토비 지글러 “내 작품은 디지털·아날로그의 혼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어린 시절 가족사진에서 출발해 완성한 회화 ‘파괴된 우상’ 앞에 선 토비 지글러. 원본 이미지는 컴퓨터 안에서 데이터로 전환된 뒤, 캔버스로 옮겨져 회화로 재구성됐다. 이은주 기자

어린 시절 가족사진에서 출발해 완성한 회화 ‘파괴된 우상’ 앞에 선 토비 지글러. 원본 이미지는 컴퓨터 안에서 데이터로 전환된 뒤, 캔버스로 옮겨져 회화로 재구성됐다. 이은주 기자

디지털과 아날로그,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작업하는 영국 화가 토비 지글러(51)의 개인전 ‘파괴된 우상’이 서울 삼청동 PKM 갤러리에서 오는 23일까지 열린다.

최근 자신의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지글러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미지 과잉 시대에 ‘좋은 그림’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란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답했다. 그는 “좋은 그림은 우리에게 천천히 자신을 드러내고 다가오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그림은 보는 사람을 새로운 세계로 끌어들이고, 더 깊게 들여다 볼수록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면서 “그림은 지식으로 보는 게 아니다. 그림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작품을 마주하고 스스로 그것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글러는 컴퓨터와 캔버스를 모두 작업의 도구로 쓴다. 우선 컴퓨터에서 고전 명화 등의 이미지를 3차원으로 모델링한 뒤 기존 이미지를 비워내고 격자 무늬 레이어만 남긴다. 그런 다음 이를  캔버스에 프린팅하고 그 위에 덧칠해 그림을 완성한다.

그는 “제 작업은 일종의 하이브리드(혼종)”라며 “이 안엔 기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구상과 추상이 혼합돼 있다”고 설명했다. 관람객이 보는 것은 추상화이지만, 그 아래엔 형태와 질감이 연기처럼 날아간 구상의 흔적이 배경처럼 깔려 있는 것이다. 그는 “미니멀아트의 대표 주자인 프랭크 스텔라(87)는 ‘루벤스(1577~1640) 그림도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잭슨 폴록(1912~1956)의 추상화로 보인다’고 했다”며 “구상과 추상은 칼로 자르듯이 나뉘어지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지글러는 “실제로 컴퓨터 안에 있는 이미지가 우리가 존재하는 물리적인 공간에 같이 존재하지 않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며 “이것을 컴퓨터 밖으로 끌어내 출력하고 붓을 사용해 그림을 더하는 과정이 그것에 숨을 불어넣는 작업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지글러는 앞서 2019년 국내 전시에서 고전 명화를 알루미늄 판에 그린 뒤 표면을 갈아 구상의 형태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덧칠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번에 선보인 8점의 회화는 알루미늄 판 대신 직물 캔버스에 작업하고, 레퍼런스(참조)가 되는 이미지를 가족사진 등 개인적 경험에서도 가져왔다. “항상 새로운 형태의 회화를 탐구해왔다”는 그가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맞닿아 있고 연결된 작업을 하고 싶어” 찾아낸 방법이다.

이번 전시작 중 하나인 ‘하비스트’는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품인 ‘윌튼 두 폭 제단화(The Wilton Diptych)’를 레퍼런스로 활용했다. 그의 캔버스에서 영국 왕 리처드 2세(재위 1377~1399)를 위해 그려졌던 원화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컴퓨터 화면 속 XYZ축이 만들어낸 리드미컬한 공간 위 붉고 푸른 붓자국만 눈에 띈다.

이번 전시 제목과 같은 그림 ‘파괴된 우상’은 그가 일곱 살 때 부엌에서 찍은 가족사진에서 출발했다. 그는 “어릴 땐 나름대로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커서 보니 사진 속엔 굉장히 힘든 시기의 가족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이미지를 해체하고 캔버스에서 재구성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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