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대학생(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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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외국을 공식방문하면 대개는 그 나라의 국회나 기자클럽 같은 데서 연설하는 게 하나의 관례처럼 되었다. 국회는 그 나라 정치의 심장부이기 때문에 그렇고 기자클럽은 여론의 구심적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또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소련을 방문중인 노태우 대통령의 14일 모스크바대학 강연은 우리에게 색다른 감회를 준다.
노 대통령은 3천여 명의 대학생을 상대로 불행했던 과거 한소 관계의 역사를 비롯하여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오늘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배경을 여러 가지 통계숫자와 사례를 들어가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그 강연을 듣는 모스크바 대학생들의 밝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TV화면에 비친 그들의 표정은 마치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은 눈 하나 팔지 않고 연단을 응시하는가 하면 어떤 학생들은 열심히 메모까지 하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여러 면에서 곤경을 겪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 한국은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조그만 나라,자기들 때문에 국토가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렀던 나라,그래서 반세기 가깝게 적대국으로 있었던 나라. 그 불행했던 과거를 딛고 오늘날 세계 11대 무역국으로 부상한 나라의 대통령이 정치,경제,과학기술협력의 파트너로 자기네 나라를 찾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연설을 경청하는 모스크바대학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착잡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대학에는 대통령도,문교부 장관도 발을 들여 놓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들이 대학을 찾는 것은 1년에 한 번 있는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고 우수한 졸업생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의 심각한 학원사태 이후 대학은 이들의 졸업식행사 참여를 거부했다. 거부한 정도가 아니라 장관의 축사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의자의 등을 돌리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자는 것은 아니다. 대학의 지성은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그것을 비판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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