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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기사는 계좌번호 줬다…한국서 현금만으로 살아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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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손해용 기자 중앙일보 경제부장
손해용 경제부장

손해용 경제부장

‘캐시리스(Cashless, 현금 없는) 사회’라길래 어느 정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도전해봤다. 신용카드 없이 현금만으로 하루 살기.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현금으로 구매한 1회용 승차권. 교통카드를 찍을 때는 1400원이던 기본요금이 1회용 승차권은 1500원으로 100원 더 비쌌다. 나중에 돌려준다고는 하지만 카드 보증금 500원도 추가로 내야 했다.

점심때 찾은 식당은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으로 메뉴를 주문하는데, 신용카드로만 결제가 가능했다. 사장님의 도움으로 현금 내고 밥 먹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소리 들었다. “요즘 누가 현금 내느냐”고. 오후에 만난 지인이 커피를 마시자는데, ‘현금 없는 매장’을 운영한다는 S·T·H사는 선택지에서 사라졌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저녁 약속 자리로 향하는 시내버스에는 현금 수납통이 없다. 교통카드 이용만 가능한 ‘현금 없는 버스’라서다. 버스 기사는 송금하라며 계좌번호가 적힌 안내문을 건네줬다. 집으로 돌아오며 동전으로 묵직해진 바지 주머니를 만지면서 한국에선 ‘현금 생활’이 고난도 과제라는 걸 실감했다.

한국은 빠르게 현금 없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주변 사람을 봐도 현금 쓰는 경우가 드물다. 직불카드는 신용카드처럼 쓰임새가 다양해졌고, 네이버페이·삼성페이 등 디지털 결제 옵션도 다양해진 덕이다. 요즘은 아이들 용돈도 현금이 아닌 체크카드로 주는 게 대세다.

현금 없는 사회는 장점이 많다. 개개인이 잔돈을 계산하거나 돈을 들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진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투명한 과세가 가능하며, 통화정책의 효과도 크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편리함의 이면에는 그림자가 있다. 디지털 기술에 취약한 노인, 외국인 관광객, 불가피한 사정으로 신용카드를 쓰지 못하는 금융 취약계층은 큰 불편을 겪기 마련이다. 이들에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깜빡 잊고 집에 카드를 두고 왔을 때, 휴대전화 배터리가 방전됐을 때, 예기치 못한 통신장애가 벌어졌을 때면 누구라도 현금 생활을 감수해야 한다.

사실 현금 없는 사회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하지만 이를 위한 충분한 사회적 합의는 이뤄졌는지, 소수의 불편이 과소평가 받는 것은 아닌지 짚어볼 필요는 있다. 한국보다 진행 속도가 빠른 스웨덴·영국 등 주요국에서는 현금 접근성 유지와 현금 사용 선택권 보장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도입하거나 추진 중이다. 최근 한국은행이 ‘현금 사용 선택권’ 보장을 위해 던진 홍보 메시지는 새겨들을 만하다. “누군가는 현금이 유일한 지급 수단입니다. 아무도 소외되지 않도록, 누구나 안전하게 사용하도록 어디서든 현금을 사용할 수 있게 모두를 배려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