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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거래소 묶인 범죄피해금 122억, 계좌 2500개 추적해 돌려준 경찰

중앙일보

입력

경기도 파주시에 사는 최모(50)씨는 2018년 6월 적금과 대출 등으로 마련한 4억 4000만원의 재산을 일거에 날렸다. 자신을 검사라고 소개한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가상자산으로 불법 자금을 세탁한 사건에 계좌가 이용됐다. 자산을 보호하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며 특정 앱을 휴대전화에 설치해 지정된 계좌로 돈을 송금토록 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보이스피싱 사기에 당한 사실을 깨달은 최씨는 은행에 피해구제를 신청했지만 허사였다. 은행이 지급정지를 하기 전에 계좌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최씨는 결국 체념했고, 가족이나 지인에게 이 사실을 숨긴 채 5년을 죄책감 속에 지냈다. 그런데 경찰이 최근 최씨의 돈 중 일부가 한 가상자산거래소로 넘어간 걸 확인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경찰은 수사 끝에 최씨를 보이스피싱 피해자로 특정했고, 해당 가상자산거래소에 동결돼 있던 계정에서 2억 3900만원을 최씨에게 돌려줬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이달 초부터 국내 5대 가상자산거래소에 동결된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금 122억원을 은행계좌 2500개에 대한 자금추적 끝에 특정한 피해자들에게 돌려주고 있다고 27일 밝혔다. 이찬규 기자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이달 초부터 국내 5대 가상자산거래소에 동결된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금 122억원을 은행계좌 2500개에 대한 자금추적 끝에 특정한 피해자들에게 돌려주고 있다고 27일 밝혔다. 이찬규 기자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대장 고석길)는 지난 22일 기준 가상자산거래소에 묶인 보이스피싱 등 범죄 피해금 40억원을 최씨 등 피해자 103명에게 돌려줬다고 27일 밝혔다. 범죄조직이 가상자산거래소에 은닉한 범죄수익을 수사기관이 계좌추적을 통해 피해자에게 환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은 나머지 피해금 82억원가량을 남은 피해자 403명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은 은행 등 금융회사의 대응이 강화하면서 대개 범죄수익 일부를 가상자산거래소를 통해 국외로 이전해 숨기는 추세다. 범죄 피해금이 은행 계좌에 남아 있는 경우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라 범죄에 이용된 계좌는 물론 이 계좌에 연결된 다른 은행 계좌들에 대해서도 지급정지하고 피해금을 환급하는 구제절차가 이뤄지지만, 이미 가상자산거래소로 피해금이 흘러갔다면 이 같은 절차를 밟기가 힘들어진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이 규정한 ‘금융회사(은행 등)’에 가상자산거래소가 포함되지 않아서다.

국내 5대(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고팍스) 가상자산거래소는 2017년부터 각사의 약관에 따라, 보이스피싱과 같은 범죄수익이 거래소 계좌로 입금됐다는 통지를 받으면 해당 거래와 연결된 계정을 동결해 왔다. 하지만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가상자산거래소와 관련한 법적 근거가 없다보니, 거래소 계좌가 있는 은행이나 연결 계좌가 있는 다른 은행으로부터 피해자에 관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 피해자들의 피해금이 길게는 5년 가까이 가상자산거래소에 묶여 방치됐던 이유다. 2017년 5월부터 지난 3월까지 국내 5대 거래소에 동결된 피해금은 122억원에 달했다.

자료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자료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자료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자료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이에 경찰은 지난 4~7월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동결된 계정의 거래와 연관된 거래소 계좌 내역부터 역으로 자금흐름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확인한 은행계좌만 2543개였다. 그 결과 보이스피싱 등 범죄 피해자 503명을 특정했고, 이들에 대한 범죄피해금 환급 절차를 개시했다. 거래소와 함께 피해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해 피해금 환급 절차를 안내했고, 범죄조직이 이용한 거래소 계정의 명의자들로부터 협조를 받아 자산처분 동의 진술서를 받아냈다. 피해금이 코인으로 묶여 있는 경우 원화를 은행계좌로 받을지, 코인을 전자지갑으로 받을지를 피해자가 직접 선택하도록 했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피해자에게는 범인 검거보다 피해 회복이 더 절박하다”며 “가상자산사업자를 ‘금융회사 등’ 범위에 포함한 특정금융정보법처럼 통신사기피해환급법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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