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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광역교통망 늘렸더니 ‘통근 고통’ 더 커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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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직장인 출퇴근 전쟁

“다시 시작될 출퇴근 공포 때문에 악몽에 시달린다. 지옥철 출퇴근은 생존 문제다.”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사는 안모(39)씨는 3년여간 김포골드라인과 공항철도, 서울 지하철 1호선을 갈아타며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으로 출근했다. 지난해 휴직으로 잠시 출퇴근을 쉬게 됐지만, 최근 복직을 앞두곤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임신 계획조차 미뤘다는 그는 “출퇴근 고통은 노력한다고 해결할 방법이 없다. 국가가 나서야 할 사회 문제”라고 토로했다.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한 이래 모든 정부가 출퇴근 혼잡 해소를 위한 대책을 내놨다. 우선 직장이 모여 있는 도심 및 인근 도시에 주택을 공급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1970~80년대엔 서울 잠실에 신시가지를 만들고, 개포동·고덕동·목동·상계동 등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울 인구가 1000만 명을 돌파한 다음 해인 1989년, 서울이 아닌 경기도 5곳에 새로운 주거지역을 조성해 주택 200만 호를 공급하기로 했다. 분당(경기도 성남), 평촌(경기도 안양), 일산(경기도 고양) 등 1기 신도시였다.

신도시 건설이 과밀화 해소를 위한 주된 정책 흐름이 되면서 출퇴근 범위는 확장됐고, 시간도 늘어났다. 특히 2003년 발표된 2기 신도시는 1기 신도시보다 먼, 서울과 30㎞ 이상 떨어진 지역이 많았다. 판교(경기도 성남), 광교신도시(경기도 수원) 등 일부를 제외하면 교통 접근성도 떨어졌다. 서울 도심 내 주거지를 갖지 못한 직장인들은 살 곳을 찾기 위해 통근시간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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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내놓은 해법은 교통망 개선이었다. 2007년 시작된 대도시권 광역교통 기본계획과 교통혼잡도로 개선사업 계획, 2019년부터 3차에 걸쳐 진행 중인 환승센터 및 복합환승센터 구축 기본계획 등이 쏟아졌고, 2019년 대도시권광역교통위원회(대광위)도 설치됐다. 목표는 광역 거점 간 통행시간 30분대로 단축, 통행 비용과 환승시간 30% 감소 등이었다. 대광위 관계자는 “출퇴근 고통이 중요한 사회문제임을 인식하고 있다”며 “국민의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광역 교통인프라 구축과 광역버스 확대 등을 지속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요즘 MZ세대 직장 구할 때 “재택근무 돼요?” 묻는다

이커머스 회사에 다니는 제연주씨는 재택근무가 가능한 회사로 이직하면서 출퇴근 시간을 그림 그리는 시간으로 활용하곤 한다. [사진 독자]

이커머스 회사에 다니는 제연주씨는 재택근무가 가능한 회사로 이직하면서 출퇴근 시간을 그림 그리는 시간으로 활용하곤 한다. [사진 독자]

그러나 지금껏 이어온 정책들이 낳은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직주근접 시대’는 신기루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출퇴근 혼잡을 해소하기 위한 지난 30여 년간의 정책 모두 ‘근본적 해법’이 되지 못했다”(이윤석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는 것이다. 도심 외곽에 대규모 주거지역을 구축하고 교통망을 늘리면서 장거리 출퇴근자 수나 이동 시간은 그대로인 상태로, 오히려 거리만 늘어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 교수는 “교통망을 확충하면 서울로 출퇴근할 수 있는 범위는 오히려 넓어지게 된다. 교통망 확장은 곧 수도권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며 “평균값을 따졌을 때 직장인들이 거리에서 버리는 시간은 이전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정책의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9.5%(1995년)였던 1시간 이상 장거리 통근 인구 비율은 14.5%(2000년), 13.7%(2005년), 15.6%(2010년), 18%(2015년), 15.3%(2020년)로 줄어들지 않았다. 코로나19의 영향을 배제하면 꾸준히 증가세다. 전명진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거시적인 정책들이 대부분 실패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통근 시간에 부담이 큰 집단에 차별적으로 정책들을 집중하는 방안을 차선책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노동 방식과 시간을 바꿔 출퇴근 문제를 해소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진행된 3년여간의 재택 실험과 유연근무 확대는 관련 논의에 불을 붙였다. 지난해 한국은행이 발표한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 확산과 경기완충 효과’에 따르면 2019년 9만5000명(전체 취업자 대비 0.3%)이었던 재택근무 경험자는 2021년 114만 명(4.2%)으로 12배로 늘었다. 오삼일 한국은행 조사국 고용분석팀장은 “근로자는 통근 시간 절약, 자율성 증대로 직무 만족도가 높아지고 기업은 사무실 유지 비용을 절감하면서 생산성이 이전보다 4.6% 높아질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분석했다.

고용노동부는 2020년 재택근무 도입 절차와 인사조직 관리 방안, 정부 지원제도 등을 담은 재택근무 종합 매뉴얼을 발표했고, 정치권도 적극적이다. 지난해 8월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주에 8시간 내 원격근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한 근로기준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존 법은 근무 장소 유연화에 대한 근거가 미비해 사업장별 자체 규정에 따라 유연근무제 실행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법을 바꿔 주 4일 사업장 근무와 주 1일 원격근무 체계를 본격 도입하겠다는 의도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구직 시장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이커머스 회사에 다니는 제연주(29)씨는 지난 두 번의 이직 과정에서 재택근무 여부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구리에서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회사를 오가며 매일 아침 ‘지옥철’과 씨름해야 했던 그의 일상은 이직을 통해 완전히 달라졌다. 1시간30분 넘는 출퇴근에 지쳐 아침밥은 물론 저녁밥도 거를 때가 많았지만, 재택근무를 한 뒤론 음식을 직접 만들 시간도 생겼다. 강남의 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이유미(34)씨 역시 “코로나19 때 재택근무를 경험한 뒤 이직 시 유연근무제가 없는 회사는 거르게 됐다. 주변에 비슷한 기준을 가진 사람이 꽤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기상조라거나, 업무 효율을 떨어뜨릴 뿐 출퇴근 문제 해소에 실질적 도움은 될 수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판교의 한 IT 회사로 출근하는 심모(32)씨는 “한 달에 3~4번 회사에 나가고 평소엔 온라인으로 소통하다 보니 업무를 익힐 때나 협업이 필요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또한 일부 업종이나 규모가 작은 회사들은 관련 제도 도입이 불가능하거나 소극적인 경우가 아직은 다수다.

장재민 한국도시정책연구소장은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을 줄이겠다는 과녁을 설정한 뒤 신도시를 만들고 교통망을 확충하는 등 화살을 쏘았지만 결국 출퇴근 시간을 줄이진 못했다”며 “이젠 직주근접이란 신기루에 가까운 목표에 집중하지 않고 수도권 과밀화를 완화하는 방식으로 출퇴근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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