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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파괴자가 됐다”…천재 핵 과학자의 탄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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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주인공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세계 최초 원자 폭탄 테스트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주인공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세계 최초 원자 폭탄 테스트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사막에 노랑·빨강·보랏빛의 버섯 모양 불기둥이 가공할 굉음과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가 이끈 세계 최초 핵무기 실험 ‘맨해튼 프로젝트’가 첫 원자폭탄(코드명 트리니티) 테스트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이어 8월 6·9일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개의 원폭은 20만 명의 피폭 사망자를 낳으며 일본의 패전을 앞당겼다. 그렇게 2차 세계대전 종지부를 찍었을 때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원폭의 아버지’로 추앙받았지만 훗날 공산당에 동조하고 소련과의 군비경쟁을 우려해 수소폭탄 반대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로부터 ‘빨갱이’로 몰리며 ‘현대 핵 과학자의 비극의 상징’으로 남은 오펜하이머. 그의 전기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 23일만인 12일 현재 전세계적으로 5억7777만 달러(약 7696억원) 매출을 올리며, 역대 가장 흥행한 2차 세계대전 영화에 등극했다.  박스오피스 전문 사이트 ‘박스오피스모조’ 집계 기준, 이 부문 1위였던 2차 대전 영화 ‘덩케르크’(2017)의 기록 5억2701만 달러를 넘어섰다.  ‘오펜하이머’의 각본·연출을 겸한 영국 출신 크리스토퍼 놀런(53) 감독은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게 됐다. ‘덩케르크’도 그가 만든 영화다.

1945년 미국 뉴멕시코에서 실제 진행된 원폭 테스트 장면.

1945년 미국 뉴멕시코에서 실제 진행된 원폭 테스트 장면.

최근 국내에서 특별판이 출간된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사이언스북스)를 토대로 1인칭 시점으로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시공을 초월한 화면을 그려냈다. 1940년대 뉴멕시코 외딴 도시 로스앨러모스 비밀 기지에 틀어박혀 첫 원폭을 개발해낸 그가 일본에 실제 원폭이 투하된 뒤에 시달린 환각,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에 휩쓸리기까지 오펜하이머의 성취와 후회를 두루 전한다.

무엇보다 폭발 장면을 일체의 컴퓨터그래픽(CG) 없이 구현했다는 점이 감상 포인트다. 실제 같은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놀런 감독은 고전적인 촬영기법을 택했다. 뉴멕시코 사막에 당시 기지를 본뜬 세트를 짓고, 휘발유·석유·알루미늄 분말·마그네슘 불꽃 등 화학 혼합물을 동원해 실제 폭탄을 제작하고, 폭발 장면을 연출해 시각적 아름다움이 압도적이다.

1945년 미국 뉴멕시코에서 실제 진행된 원폭 테스트 현장 과학자들.

1945년 미국 뉴멕시코에서 실제 진행된 원폭 테스트 현장 과학자들.

하지만 폭발 장면에서 원폭의 공포까지 실감 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피폭의 참상을 오펜하이머의 환각 형식으로 그리고 있어서다. 원폭 성공 연설을 하던 그가 청중의 살갗이 원폭의 섬광 같은 빛에 찢겨나가고, 박수갈채가 폭발음처럼 들리는 환상을 겪는 장면은 “파우스트의 거래를 한”(『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중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 과학자의 죄책감을 현실감 없이 전할 뿐이다. 히로시마로부터 1만㎞ 떨어진 로스앨러모스에서 핵 실험에 열중한 과학자의 심리적 거리감을 담은 연출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오펜하이머’ 촬영 현장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가운데). [AP=연합뉴스]

오펜하이머’ 촬영 현장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가운데). [AP=연합뉴스]

영화는 원폭이 낳은 상흔보단 오펜하이머란 한 인간의 진실을 거대한 퍼즐처럼 맞춰나가는 데에 열중한다. 양자역학·천체물리학 등 이론물리학에서 주목받는 스타였던 그는 대공황 시기 진보적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투입된 후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내 손에 피가 묻은 것 같다”고 호소해 “울보 물리학자” 비아냥도 들었다. ‘진정한 애국자’이자 ‘거짓말쟁이 빨갱이’란 상반된 수식어가 평생 따라다녔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와 대립했던 원자력위원회 창립위원 루이스 스트로스가 1959년 상무장관 지명이 걸린 상원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의 그늘진 면모를 들춰내는 장면들은 흑백화면에 담았다. 반면 오펜하이머 시점의 장면은 컬러 화면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스트로스는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구시대를 상징하는 듯한 흑백 화면 속에 갇힌 그는 오펜하이머와 달리 미국 원자력 정책의 중추 역할을 했고, 오펜하이머가 반대했던 수소폭탄을 지지했다.

오펜하이머의 고통은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치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원폭 프로젝트에 참여한 그는 2차 대전 종식 이후 또 다른 냉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스스로 희생양이 된다. ‘원폭의 아버지’였지만 원폭을 통제할 힘은 주어지지 않았다.

놀런 감독은 ‘오펜하이머’가 결국 오펜하이머 그 자신이 된 듯 그의 머릿속에 일어난 일을 펼쳐낸 영화라 설명했다. “관객을 바로 그 중대한 결정의 순간으로 안내하고 싶었다”고 놀런 감독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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