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정말 '끝장' 한번 볼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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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선자금 수사가 어디까지 갈지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송광수 검찰총장과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도 모를 것이다.

사면이란 소리를 쉽게 꺼낼 사람도 별로 없다. 이미 정치자금을 고백해 1심 판결(벌금 5백만원, 추징금 2천만원)까지 받고 항소한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라면 모를까, 처음 사면 얘기를 꺼냈던 노무현 대통령도 이젠 대선자금 전모를 수사해 밝히자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사면에 대한 정치권의 생각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한창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무슨 김빼는 소리냐고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역(逆)으로 수사가 더욱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사면의 가능성은 더 커진다고 봐야 한다. 정치인 몇 사람을 구속하긴 쉬워도 정치인 거의 모두를 잡아가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무제한적 특검을 하자는 한나라당 주장이나 대선자금 전모를 수사해 밝히자는 盧대통령의 제안은 그래서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서로 내년 총선을 겨냥해 선명성을 부각시키며 어느 쪽 피해가 더 클지 갈 데까지 가보자는 형국이다. 그러다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일을 터뜨려 놓은 다음엔 '어찌 하오리까'하는 식으로 국민에게 수습 방도를 찾아달라고 할 텐가. 정치권은 지금 차마 입이 먼저 안 떨어져 그렇지, 속으로는 사면 생각이 굴뚝 같을 것이다. 결국 사면의 수순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계산도 이미 서 있을 법하다.

하지만 대선자금 사면 여부는 정치권의 계산과 힘겨루기만으로 풀릴 일이 아니다.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시민단체들의 견제도 견제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큰 문제는 '그럼 기업 분식회계는 어찌 다룰 것인가'다.

회계 장부에 차변(借邊).대변(貸邊)이 있듯, 정치자금을 받은 쪽이 있으면 정치자금을 준 쪽이 있다. 정당이 비자금을 감추려 이중 장부를 만들듯, 기업이 비자금을 만들려면 분식회계를 해야 한다. 불법 정치자금과 기업 분식회계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런데 기업 분식회계를 다루는 일은 정치인 잡아가두는 일보다 더 복잡하다. 정치인 수사는 형평을 맞추는 게 첫째고 사면이 없다면 극단적인 경우 정치판의 대규모 물갈이로 마감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업 수사는 회계 장부가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고, 끝까지 간다면 상장기업들의 물갈이도 벌어질 수 있다. 기업.기업인.근로자.회계법인.주주들은 다 어찌하나. 盧대통령도 그래서 정치자금을 댄 기업에 대해서는 사면 제안을 할 수도 있다는 한 자락을 깔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식회계가 드러났는데, 그 돈이 대선자금으로 갔으면 사면이고 다른 데 쓰였으면 처벌이다? 돈에는 꼬리표가 없는데 대선자금과 다른 용처의 비자금은 무슨 수로 가려낼까. 盧대통령은 '뇌물'과 '보험성 정치자금'을 구분했지만 과연 뇌물과 보험의 경계가 명확할까. 앞으로도 기업 분식회계를 들여다보다가 정치자금과 관련되면 그냥 덮나?

이래저래 정치자금 수사에 '끝장'이란 있을 수 없다. 적당히 덮자는 소리가 아니라 감당하지도 못할 일은 벌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제한적 특검을 하자거나 검찰수사로 전모를 밝히자고 하는 것은 상대방 압박용이지, 현실과 미래를 생각하는 지혜가 아니다.

지금 용기있는 주장은 각 당이 대선자금을 다 고백하고 검찰이 검증한 뒤 정치적.사법적.경제적 수습 방안을 찾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곤 하루 빨리 새 정치자금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수사하자, 파헤치자, 처벌하자며 마음 속에도 없는 소리만 높이다가 내년 4월 총선도 또 이대로 치를 것인가.

김수길 기획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