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은행에선 뛰지 마세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김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경희 경제부 기자

김경희 경제부 기자

“Don’t run.”

지난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미국의 한 은행에 이런 문구가 걸렸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뱅크런(bankrun·대규모 예금인출사태)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소나기를 피하려던 사람들이 하필 은행이 있는 건물 처마 밑으로 피하면서 긴 줄이 생겼는데, 다음 날 뱅크런이 발생해 그 은행이 망했다는 괴담도 떠돈단다. 실제로 미국의 중소은행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1분기 미국의 사무실 공실률은 19%로 1992년 이후 31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상업용 부동산이 ‘약한 고리’로 지목되면서 해당 대출 비중이 큰 중소은행 위기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은행 본점 앞에 고객들이 길게 줄 서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지난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은행 본점 앞에 고객들이 길게 줄 서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6월 기준금리를 동결했지만 연내 추가 인상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 것도 부담이다. 예금금리·채권금리가 높아지면 자금조달비용도 늘어나 중소은행의 ‘유동성 리스크’가 커질 수 있어서다.

문제는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나 루머가 뱅크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다. 실리콘밸리은행의 그렉 베커 전 CEO는 지난달 미 상원은행위원회 청문회에서 “(가상자산 전문은행) 실버게이트 캐피탈의 파산을 실리콘밸리은행과 연결 짓는 각종 소문과 오해가 온라인상에 확산하면서 뱅크런이 시작된 것”이라고 항변했다.

지금 남 탓할 때냐는 비판도 나오지만 일리 있는 얘기다. 실리콘밸리은행은 스타트업에 자금줄을 대주는 특화은행이다 보니 예금주 중 벤처캐피탈의 비중이 높은데, 이들은 뱅크런에 대한 민감도가 남달랐을 거란 추측이 나온다. 가상자산 거래소인 FTX가 뱅크런으로 파산했을 때, 거액을 투자했다가 손실을 본 벤처캐피탈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SVB사태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미 중소은행과 규제 환경이 비슷한 저축은행·새마을금고 등 비은행의 유동성 리스크 우려가 제기돼왔다. 한국은행은 21일 금융안정보고서에서 “비대면 수신 규모 확대 등으로 부정적 정보 확산시 보다 빠르게 예금이 인출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도 비은행간 상호연계성이 낮고 각 중앙회의 유동성 지원 여력도 있어서 전체 금융위기로 확산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비대면 거래가 늘면서 은행의 고객 예금 관리는 더 어려운 숙제가 됐다. 과거에는 결혼과 비슷했다면 이제는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동거 관계라는 해석도 나온다. 국내 은행에서 “뛰지 마세요”와 같은 경고 문구를 보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