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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제원의 시선

김민재는 왜 철기둥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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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스포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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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바다를 바라보며 공을 찼다. 작은 횟집을 운영하던 그의 부모는 어려운 형편에도 아들에게 운동을 시켰다. 식당 2층이 그와 형, 엄마·아빠 등 네 식구의 보금자리였다. 소년은 잠들기 전마다 다짐했다. 꼭 축구로 성공해서 돌아오리라.

손흥민에 이어 또 한 명의 걸출한 축구 스타가 탄생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나폴리에서 뛰고 있는 김민재다. 소속팀 나폴리를 33년 만에 우승으로 이끈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그다. 경남 통영 출신 소년이 어느덧 세계적인 축구 스타로 성장했다. 나폴리 현지에서 김민재는 요즘 영웅으로 통한다. 수많은 이탈리아 팬들이 “김! 김! 김! 김!”을 연호하는 모습을 보면 요즘 말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킴’이 아니라 우리말 발음과 흡사하게 ‘김’이라고 외친다.)

실력·친화력 갖춘 나폴리의 영웅
강력 육탄방어로 ‘철기둥’ 별명
“아시아 선수 약하다” 편견 없애

한국 축구 역사상 이런 선수가 있었던가. 피지컬이 웬만한 유럽 선수 뺨치는데 순발력은 육상 선수 못잖다. 킥은 기본이고 헤딩 실력도 뛰어나다. 굳이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를 꼽자면 차두리 정도인데 김민재는 ‘사이즈’가 다르다. 우선 1m90㎝의 큰 키에 근육질 몸매가 압도적이다. 최고 시속 35㎞의 속도로 달려가 번개같이 공을 따낸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괴물’이다. 단순히 공을 잘 걷어내기만 한다면 이런 별명이 붙을 수 없다. 그는 수비수인데도 공격적인 패스로 팀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키가 큰 데 빠르기까지 하니 웬만한 공격수는 김민재의 벽을 넘기 힘들다. 강력한 육탄방어와 공에 대한 악착같은 집념은 1972년부터 88년까지 나폴리에서 활약했던 레전드 수비수 주세페 브루스콜로티를 빼닮았다. 올 시즌 김민재의 활약을 지켜본 브루스콜로티는 ‘철기둥(pal e fierr)’이라는 자신의 별명을 후배에게 물려줬다. 김민재라면 ‘철기둥’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다시,카타르』 국영호·박린, 북콤마)

이게 바로 김민재가 그의 선배들과 차별화되는 포인트다. 이전까지 유럽의 축구 관계자들은 ‘아시아 선수들은 작고 약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지난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손흥민을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시아 선수들은 살짝만 부딪혀도 쉽게 넘어진다는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김민재는 다르다. 오히려 김민재와 부딪히면 상대 선수가 나가떨어지기 다반사다. 아시아에서 온 강철같은 괴물 수비수의 출현에 나폴리 팬들이 열광한 것도 당연하다.

피지컬도 좋지만, 김민재는 축구 지능도 뛰어나다. 언제 전진 패스를 해야 할지, 언제 백패스를 해야 할지를 안다. 위험 지역에서 공을 걷어내기 급급한 게 아니라 효과적인 패스로 공격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볼 키핑력과 패스 실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꿈도 못 꾼다. 이게 바로 김민재의 축구 센스이자 또 하나의 차별화 포인트다.

그런데 축구 실력 못지않게 뛰어난 건 통영 ‘촌놈’ 김민재의 친화력이다. 그는 지난해 7월 나폴리팀 입단식에서 음료수 병을 들고 ‘강남스타일’을 불러제꼈다. 말춤까지 추면서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나폴리 선수들과 팬들은 순식간에 마음을 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김민재에 열광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보면 이 나라의 축구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다. 김민재 닮은꼴로 유명한 정동식 심판은 최근 나폴리를 방문했다가 김민재와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반대로 2002년 한ㆍ일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골든 골을 터뜨린 안정환이 이탈리아에서 얼마나 힘든 일을 당했을지 상상이 간다. 안정환은 이탈리아전에서 골을 넣었다는 이유만으로 미운털이 박혀 당시 소속 팀이던 페루자에서 쫓겨났다.

김민재가 축구를 하면서 ‘꽃길’만 걸은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선배들의 축구화를 물려받아 신었다. 2012년 17세 이하 대표에 선발된 뒤엔 통영에서부터 아버지가 운전하는 생선 트럭을 타고 7시간 동안을 달린 끝에 파주 훈련장에 도착했다. 횟감을 나르는 물차가 그의 통근버스였던 셈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는 K리그 경기 도중 정강이뼈 골절상을 당해 대표팀 엔트리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김민재의 가슴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그는 이 문구를 가슴에 간직한 채 공을 차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중국과 튀르키예를 거쳐 이탈리아에서 최정상급 반열에 올랐다. 그의 도전은 계속된다. 김민재는 이제 세계 최고의 무대, 프리미어리그로 건너갈 예정이다. 다음 시즌에도 김민재의 활약을 기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