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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외교는 정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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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내년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국빈을 불러놓고선 회담의 주목도를 흐리는 일 아니냐는 질문이 나온 건 당연했다. 이에 대한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의 대답. “세계 무대에서 윤 대통령의 리더십과 관점, 그리고 한국의 선한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는 기간이 될 것이다.” 돌려 말했지만, 윤 대통령의 국빈방문과 바이든의 출마 선언이 ‘윈-윈’할 것이라는 뉘앙스다. 외교가 우선인지, 정치가 우선인지 알쏭달쏭하다.

바이든의 정치에 기여한 국빈방문
기시다는 정상회담 후 인기 급상승
외교 성과가 정치적 결실 맺으려면
절제된 말과 ‘반 발자국 정신’ 필요

아닌 게 아니라 윤 대통령의 국빈방문은 바이든으로서는 훌륭한 정치 이벤트였다. 43분간 진행된 윤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에는 자유가 46번, 동맹이 27번, 민주주의가 18번 언급됐다.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미국의 역할이 강조됐다. 미국적 가치에 대한 헌사였다. 바이든 입장에서는 중·러에 맞선 동맹 확보의 성공을 과시하는 기회가 됐다. 양국의 경제 현안이었던 반도체 문제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언급되지 않았다. IRA와 반도체법은 바이든의 재출마 포석 중 하나다. 뉴욕타임스는 “윤 대통령의 국빈방문 중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민을 화나게 했던 IRA를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웠다”고 지적했다. 바이든은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윤 대통령에게 내심 고마웠을 법하다.

정상회담 효과를 즐기는 것은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20%대 지지율이 최근 50%대를 돌파했다(니혼게이자이 여론조사). ‘나가타초(永田町·의사당이 있는 일본 정치 중심지)의 재미없는 남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기시다의 존재감이 확 뛰었다. 낮은 지지율로 중의원 해산 걱정을 하던 기시다는 이제 오히려 높은 지지율 때문에 의회 해산을 저울질하고 있다. 이참에 선거를 다시 치러 안정적 집권 기반을 마련하려는 ‘행복한 고민’이다.

7일 방한하는 기시다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발언을 할지 관심이다. 상황이 녹록지는 않다. 기시다가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가 담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계승 의지를 표명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지만, 구체적 표현 수준은 지켜봐야 한다. 지난 3월 정상회담 때는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뜨뜻미지근한 언급에 그쳤다. 당내 입지가 약한 기시다로서는 당내 강경 우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지난달 치러진 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이겼다고는 하나 자민당보다 더 오른쪽인 일본유신회가 약진한 것도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우파의 주장은 논리가 아니라 ‘정념’이다. ‘합리적’ 기시다가 이를 돌파할지가 주목된다.

윤 대통령도 한미정상회담 이후 지지율이 올랐다. 리얼미터 조사 결과 국정 수행 긍정 평가가 한 주 전보다 1.9%포인트 상승했다. 그러나 한일관계 논란, 도·감청 시비 등으로 잃어버린 지지율의 회복에는 미치지 못한다. 지지율 하나로 외교 성과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미·일의 지도자가 즐기는 외교 효과를 우리 대통령은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성찰해야 한다.

결국 섬세함이다. 문제의 상당 부분은 대통령의 지나치게 직설적인 화법에 기인한다. 엊그제(2일) 기자단 간담회에서 나온 “(중국이) 대북 제재에 동참 안 하면서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냐” “적대 행위만 안 하면…” 등의 발언도 외교적 용어로 적절한지 의문이다. 지나친 공격적 언어는 중국이 중시한다는 ‘체면 외교’의 여지를 없애버릴 수 있다. 아무리 잘못한 상대에게도 최소한의 체면은 남겨둔다는 ‘류몐즈(留面子)’라는 중국 단어도 있지 않은가. 중국의 눈치를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강한 용어만이 국가적 자존심을 표현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말은 참모의 입을 통해 나오게 해도 충분하다. 외교야말로 ‘굿캅배드캅’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국민과의 ‘반 발자국’ 거리다. 영국의 외교관 로버트 쿠퍼는 “국가는 머리가 조언하는 대로보다는 심장이 요구하는 대로 반응한다”고 했다. ‘100년 전 일 무릎’ 발언은 말하자면 국가의 심장을 건드린 셈이다. 영국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서 일했던 이 노(老) 외교관은 “대외 정책도 결국 국내 정치에 의해 좌우되며, 대외 정책이 항상 이익을 두고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는 조언을 남겼다(『The Breaking of Nations』, 이상돈닷컴 참조).

외교의 목적은 ‘국익’이다. 하지만 국익의 개념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외교가 국가라는 ‘단일 행위자’가 한다는 생각도 순진하다. 외교는 안보·경제·여론 등이 정치 지도자의 인식을 통해 구체화하는 복합적 과정이다. 지도자의 인식이 국민과 거리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 거리부터 좁히는 것이 외교의 첫걸음이다. 지도자가 생각하는 국익이 종래엔 국민의 이익에 닿는다는 점을 절제된 언어로, 끈기 있게 설명해야 한다. 전쟁이 외교의 연장선에 있듯이 외교는 정치의 연장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