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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이념보다 인정” 칠남매 바라지에 속울음 터뜨린 율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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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우리가 몰랐던 율곡 이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형님께 잔을 올려 작별을 고하니 정신이 멍하니 흩어지는 듯합니다. 집 지을 곳이 정해지는 대로 형님의 식솔을 이끌고 해주로 돌아가겠습니다. 조카들을 가르치고 일으켜 집안을 실추시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형님이시어! 편히 눈 감으시고 외로운 처자 걱정일랑 조금이나마 놓으소서.(‘제백씨문·祭伯氏文’)

띠동갑 맏형의 죽음을 맞게 된 서른다섯의 율곡 이이(1536~1584)는 “부귀가 아니면 명이라도 길지, 하늘은 왜 이리 편파적인가”라며 형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몸이 아파 32살에 늦장가를 든 탓에 형의 자녀들은 아직 어리다. 율곡은 건강과 정치 문제로 서울에서 해주로 다시 서울로 자주 이사를 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형수 곽씨와 2남 2녀의 어린 조카들을 이끌고 다녔다.

학문·정치 공적에 가려진 인간미
집안 대소사 챙기며 식솔 이끌어

먼저 죽은 맏형 가족 끝까지 살펴
세 누이 자녀도 제자로 받아들여

서자 신분 아들을 후계 지목 파격
주자학 질서 고집한 당대와 마찰

‘숨어서 울고 있는’ 인간 율곡

율곡 이이의 생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활짝 핀 율곡매 후계목. 천연기념물인 율곡매는 오죽헌이 들어선 1400년경에 심어졌다고 한다. [연합뉴스]

율곡 이이의 생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활짝 핀 율곡매 후계목. 천연기념물인 율곡매는 오죽헌이 들어선 1400년경에 심어졌다고 한다. [연합뉴스]

우리가 알고 있는 율곡은 퇴율(退栗·퇴계와 율곡)로 병칭되듯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으로 굵직한 업적과 감동적인 신화를 남겼다. 아홉 번 수석 합격이라는 구도장원(九度壯元)의 주인공이자 조선 후기 정계와 학계를 주도한 서인계의 종주(宗主)였다. 무엇보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손을 잡고 자녀교육의 신화적 모델로 500여 년을 군림했고, 궁극에는 모자가 각각 화폐 도안 인물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가 있었는가.

그런데 그가 걸어온 삶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화려한 주연이었던 공적 삶과는 달리 ‘숨어서 울고 있는’ 인간 율곡을 목격하게 된다. 그가 이룬 성취나 결과가 중요한 만큼 누구와 무엇을 나누고 어떤 일에 슬퍼하고 또 기뻐하는지, 그가 추구한 일상의 가치와 의미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외로운 처지의 가족을 돌보듯이 율곡은 형제자매의 의지처가 되고자 했다.

일곱 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난 율곡은 자(字)가 숙헌(叔獻)인데, 이는 형제의 서열 백중숙계(伯仲叔季)에 온 것이다. 큰형 이선의 자는 백헌이고 작은 형 이번은 중헌, 막내 이우는 계헌이다. 이들 사이사이에 세 딸이 태어나 남매의 배열은 공교롭게도 아들-딸-아들-딸-아들-딸-아들이 되었다.

칠남매가 부모 유산 균등 분배

경기도 파주에 있는 율곡 이이 유적. 율곡을 모신 자운서원과 율곡의 가족 묘역이 있다. [사진 문화재청]

경기도 파주에 있는 율곡 이이 유적. 율곡을 모신 자운서원과 율곡의 가족 묘역이 있다. [사진 문화재청]

남매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10년 사이로 세상을 뜨고 그 5년이 지난 시점에서 부모가 남긴 재산을 나누는 ‘화회문기(和會文記)’를 작성한다. 율곡 31세 때의 일로 당시 맏이 이선은 43세, 막내 이우는 25세였다. 아직 20대인 율곡의 여동생은 남편 홍천우와 사별하여 혼자 참석한다. 분배의 원칙은 선조들의 제사와 묘소 관리를 위한 토지 등을 배정한 다음 태어난 순서나 성별과 관계없이 7남매가 균등하게 나누었다.

파주 율곡 유적 안에 있는 율곡 묘소. [사진 문화재청]

파주 율곡 유적 안에 있는 율곡 묘소. [사진 문화재청]

나눌 재산은 대략 4만6500평의 전답과 노비 119구(口)인데, 노비의 구성은 남자 68구, 여자 51구이다. 이 가운데 타 지역에 거주하며 신공(身貢)만 바치는 노비가 89구, 동거하는 노비가 30구로 각자에게 돌아간 노비 수는 15~16구이다. 토지의 95% 이상이 파주에 집중되어 있어 대부분이 부친 쪽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부모 대에는 대호(大戶)에 속했던 재산이 균분 상속을 통해 흩어져 버렸다.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자녀가 많을수록 더 가난해지는데, 임란 이후 장자에게 몰아주는 방식으로 상속 관행이 바뀌는 것은 조상의 권위와 문중의 성장에 필수불가결한 조치라 할 수 있다.

“서얼을 풀고 인재 고루 등용” 지론

율곡 이이 초상

율곡 이이 초상

나이나 성별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은 방식의 재산 분배는 그 시대의 법이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종족의 결속을 위해 딸의 상속을 제한하는 변법이 가동되던 시대였다. 그런 점에서 율곡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남매의 분재는 율곡의 철학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는 자궁이 약한 부인 노씨의 소생을 기다리다 40에 이르러서야 서자 신분의 아들을 얻는다. 서자손으로는 가문의 영광을 만들기가 불가능한 시대, 적통 양자를 세우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서자를 계후자로 지목한다. 서얼금고(庶孽禁錮)를 풀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라는 평소 지론을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율곡 남매의 분재에서 흥미로운 점은 제사에 관한 규정인데, 돌아가며 지내던 것을 종자(宗子)에 고정시키고 비용으로 매년 쌀을 거두기로 한다. 친자녀는 10말, 친손자녀는 5말, 친증손자녀와 외손자녀는 2말을 내도록 했다. 그런데 이 규정을 만든 4년 후에 종자 이선(1524~1570)이 죽는 바람에 그의 유족이 3남 율곡의 집에서 살게 되어 이후의 모든 조상 제사는 율곡의 몫이 되었다.

단순 계산상으로 율곡의 남매들은 대략 5000~6000평씩의 토지를 물려받았지만 소출이 많지 않아 다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다. 율곡의 작은 형 이번(1531~1590)의 경우는 황해도 배천(白川)에서 공한지를 개간하는 등의 적극적인 대책을 취하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이웃한 봉흔의 참소를 받아 ‘율곡의 권세’가 남용되었다는 구설에 오르자 왕까지 나서서 형의 토지라 해도 봉가에게 다 넘겨주라고 한다.(선조 13년 5월 26일) 이에 율곡은 “곤궁한 형님이 진흙땅을 갈아 생활을 꾸려가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많은 식구를 건사하는 율곡의 경우도 살림이 어려워 처가 쪽의 집까지 팔아 쓰는 상황이었다.

큰누나 딸의 죽음에 애도문

보물로 지정된 이이 남매 화회문기(和會文記). 16세기 재산 상속 및 분배의 관행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아들 딸 구분하지 않고 균등하게 분배했다. 건국대박물관 소장. [사진 문화재청]

보물로 지정된 이이 남매 화회문기(和會文記). 16세기 재산 상속 및 분배의 관행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아들 딸 구분하지 않고 균등하게 분배했다. 건국대박물관 소장. [사진 문화재청]

율곡은 세 누이와도 각별한 정을 나누는데, 그녀들의 소생을 제자로 받아 가르치거나 송익필·성혼 등의 스승을 점지해주기도 한다. 조카들에게 좋은 혼처를 찾아주려고 동분서주하는 율곡을 문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특히 큰누나 이매창(1529~1592)의 딸인 질녀 조씨가 어머니 사임당에서 누나 매창으로 이어지는 예술적 재능을 보이자 ‘우리 집안의 여사’라며 큰 기대를 보인다. 그런 질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눈물로 쓴 애도문 두 편이 전한다. “네가 어린애 안은 것도 보았고/ 어린 네가 평상 붙들고 놀 때도 생각난다./ 친족들이 모두 여기 모였는데/ 우리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가려 하느냐.”(‘만심언명처·挽沈彦明妻’)

정치와 학술 등의 공적인 행보만으로도 벅찰 지경인 율곡, 부모의 기(氣)를 받은 형제자매와 그 자녀들까지 마음을 다해 지켜내느라 기운이 소진할 법도 하다. 48세 이른 나이에 과로로 죽은 이이를 온 나라가 슬퍼했다는 실록의 기사에 수긍이 간다.

율곡이 가족 속에서 행한 실천이 조선 중기 예론(禮論)의 이슈가 되는데, 서모의 자리를 정하는 문제와 자매의 남편 자리를 정하는 문제 등이었다. 율곡은 작은 누나의 남편 윤섭이 자신보다 나이가 적지만 누나를 기준으로 상석에 앉히는데, 온당한 처사가 아니라는 학계의 비판을 받게 된다. 논쟁자들은 “여자는 남편의 나이 차례로 앉는다”는 『예기』를 인용하며 “아내의 나이로 자리를 정하는 것은 잘못(妻齒爲坐之非)”이라고 한다.

나이 어린 매형을 상석에 우대

그들은 자매들을 나이대로 한 자리에 앉히고, 다른 자리에 사위와 형제들을 나이대로 앉히는 것이 윤리라는 하나의 예설을 도출한다.(『우계집』 4) 적서(嫡庶)나 남녀 등 일상의 모든 관계를 주자학적 예적 질서로 재편하려던 예학자들의 눈에 이념보다 인정(人情)을 중시한 율곡의 실천이 비윤리로 보인 것이다.

율곡이 가장 마음을 쓴 형제는 여섯 살 아래의 동생 이우(1542~1609)다. 율곡의 시에는 거문고를 든 동생이 자주 등장하고, 이우의 시에는 셋째 형을 모신 ‘배숙씨(陪叔氏)’ 풍경이 더러 나온다. 율곡이 죽기 직전에 한 말을 받아 적은 이도 동생 이우였다. 율곡은 22세이던 1557년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을 하여 서울과 성주를 오가는 생활을 하는데, 처가에 올 때면 항상 아버지나 형제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때 서예의 대가 선산 사족 황기로(1521~1567)와 바둑을 두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그들을 지켜보던 이문건은 1559년 3월 14일의 일기에서 “황기로가 별관에서 이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썼다.(『묵재일기』) 그 후 이우는 황기로의 사위가 되었고 낙동강 변의 매학정을 물려받아 부를 누리며, 시서화금(詩書畵琴)의 예술혼을 꽃피우게 된다. 신사임당과 율곡 남매의 서화를 수집하고 보존하여 다음 세대로 전한 가족 대표는 이우의 후손에서 나온다.

우리는 이이의 학문적 사회적 성취에 주목해 왔지만 그가 나눈 남매간의 정과 사랑은 오늘 우리의 가족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