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원서 자립이 고립으로
얇고 까슬한 여름 이불 하나, 티셔츠와 바지 두 벌.
2014년 봄 허진이(28)씨가 보육원을 졸업할 때 들고 나온 물건이다. 채워진 곳보다 빈곳이 많은 캐리어를 끌고 19년간 머물던 보육원을 나섰다.
성인이 됐지만 그동안 써보지 못한 세탁기 사용법부터 적응이 안 됐다. 스스로 시간표를 짜 움직이는 삶은 자유가 아니라 혼돈이었다. 정착금 800만원은 금방 없어졌다. 용돈 지출 습관을 익히지 못한 탓이다. 사회복지학 공부는 뒷전이 됐다. 성적 부진을 이유로 기숙사 퇴소 통보도 받았다. 그즈음 보육원 친구 두 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허씨는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들이 더 편할 수도 있겠다’는 위험한 충동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좌절감 속에서 발버둥치던 중 친구의 소개로 자립준비청년 모임에 참여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경험담을 공유하며 하나씩 해결책을 찾았다. 한 중소기업이 주는 장학금도 타게 됐다. 허씨는 “벼랑 끝에 섰는데 희망의 끈을 잡을 수 있어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모든 자립준비청년이 허씨처럼 희망을 얻진 못한다.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청년들의 극단적 선택이 이어지고 있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스스로 세상을 등진 자립준비청년은 2019~2021년 13명이다. 생사조차 모르는 연락 두절 상태의 청년은 27명(2021년 12월 기준)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말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가가 책임지고 자립준비청년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부모의 심정으로 챙겨 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두 달 뒤인 11월 부산시 금정구에서 자립을 준비하던 이모(당시 21세)씨가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과 구청은 이씨가 빚과 실직에 따른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비극적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보육원 졸업 뒤 2년 만에 스스로 삶을 포기한 것이다. 숨진 이씨를 관리한 부산시 보호아동자립센터 한 관계자는 “이씨처럼 성인이 된 청년들이 연락을 거부하면 ‘연 1회 연락 의무’ 규정을 지키는 것 말고는 강제로 접근할 권한이 없다”고 털어놨다.
자립준비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믿을 만한 어른과의 유대다. 김형모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사회에 잘 적응한 자립 청년들은 연락할 사람이 시설 원장님이든, 따로 만난 멘토든 적어도 한 명은 있다. 모르는 게 있으면 가르쳐주고, 고민을 들어줄 어른이 있어야 한다. 지속적인 멘토링이 필요하다”고 했다.
보육원 출신 편견이 서럽다…“알바 중 비품 없어져도 날 의심”
엄지은(가명·28)씨는 9년 전 보육원을 졸업한 뒤 한 커피체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서기에 도전했다. 하지만 세상의 편견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어느 날 매장 비품이 없어졌을 때 모든 동료 알바생이 범인으로 엄씨를 지목했다. 엄씨는 “보육원 출신이라는 편견 때문에 물건이라도 없어지면 제일 먼저 내가 의심받는다”며 “그럴 때마다 잘 살아봐야겠다는 의지가 꺾인다.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털어놨다.
홀로서기를 준비해야 하는 ‘보호대상아동’은 매년 3000명 이상 발생한다. 보호대상아동이란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가 양육할 능력·자격이 없어 국가의 책임 아래 맡겨지는 이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이혼이나 학대, 경제적 어려움 등 원가정 문제로 발생한다. 가장 많은 원인은 학대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부모의 학대로 보호조치아동이 되는 비율은 2021년 기준 48.3%다.
2021년 보호조치된 아동 3437명 중 3분의 2(2183명)가 시설로 향했다. 보육원 등 양육시설이 996명으로 가장 많았고, 공동생활가정(그룹홈) 546명, 보호치료시설 282명이 뒤를 이었다.
보호대상아동은 만 18세가 되면 보호가 종료된다. ‘자립준비청년’으로 이름도 바뀐다. 이때 500만~1500만원의 자립정착금과 자산형성 지원통장을 갖게 된다. 보호 종료 후 5년간 월 40만원의 자립수당도 받는다.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온전한 자립을 준비하라는 취지다.
이를 악용해 보육원 출신 청년들의 돈을 가로채기 위한 접근과 유혹이 끊이지 않는다. 자립준비청년의 멘토로 활동하는 이성아(40)씨는 “먼저 사회에 나간 자립 선배들이 후배에게 접근해 사기를 치는 일도 종종 목격된다”고 전했다. 이씨는 “보육원에서 갓 나온 후배를 유흥주점으로 데려가 몇백만원씩 술값을 내게 한 뒤 연락을 끊어 버리는 일도 있다”며 “졸업 전에 꾀임에 속지 말라고 당부하는 게 중요한 일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사한 피해 사례가 늘자 정부는 2021년부터 희망자에 한해 만 24세까지 시설에 머무를 수 있도록 했다.
자립청년과 이들을 지원하는 종사자들이 서로 유대감을 쌓기 어려운 현실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에선 자립지원 직원 1인당 102명(지난해 11월)의 청년을 관리하고 있다. 강선우 의원실에 따르면 캐나다에선 직원 1인당 청년 20~30명을 담당한다.
예비 자립준비청년들은 ‘선배들’이 돈을 탕진하고 실패했다는 소식에 두려움을 느낀다. 올해 자립에 도전한 이장우(가명·19)군은 ‘캠퍼스 로망’이란 말에 현혹되지 않으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다. 그는 “술도 마시지 않을 것”이라며 “우린 부모라는 ‘백’이 없어 한 번 망치면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언을 해줄 어른의 존재는 그만큼 중요하다. 허진이씨는 어려울 때 힘이 돼준 어른을 만난 덕에 자립에 성공하고 가정도 꾸렸다. 반면에 지난해 11월 부산의 한 빌라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이모(당시 21세)씨는 그런 어른을 만나지 못한 사례로 꼽힌다. 수도권 한 보육원의 이천규 국장은 “부모님 도움이 필요 없어지는 때란 건 개인마다 모두 달라 18세냐 24세냐로 일괄적으로 선을 그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상당 기간 누군가와 연결돼 도움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보건복지부 소속 아동권리보장원은 ‘바람개비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자립준비청년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경험을 나누게 한다. 허진이씨가 도움을 받았던 모임도 바람개비 서포터즈였다. 홀트아동복지회 등 민간단체에서도 자립청년과 성인을 연결하는 멘토-멘티 활동을 한다. 하지만 민관의 모든 활동을 합쳐도 연간 2000~3000명씩 보육원을 나서는 자립청년을 모두 도와주기엔 역부족이라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결국 사회 적응에 성공한 자립준비청년 선배들도 나섰다. 허진이씨, 신선(30)씨 등은 아름다운재단에서 활동하며 보육원 출신 아동을 향한 편견에 맞서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전국의 보호아동과 자립준비청년들을 만나 고민 상담을 하고, 자립에 필요한 정보를 동영상이나 팟캐스트로 만들어 유튜브 등에 올리기도 한다.
반응이 좋았다. 사례별 경험을 나눈 유튜브와 팟캐스트엔 “나도 그게 고민이었는데, 좋은 정보 알아간다”라거나 “자립하는 데 에너지를 얻게 됐다”는 댓글이 달렸다. “시설 출신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는 말은 이들에게도 힘이 됐다. 이들은 ‘자립청년 어벤져스’라는 별명도 얻었다.
어벤져스는 또 있다. 네이버 웹툰 작가로 데뷔를 앞둔 지혜인(24)씨는 본인처럼 만화 창작을 꿈으로 가진 후배 보호아동들을 대상으로 멘토링을 시작했다. “저는 부모님이 없어서 입시를 할 때 힘들었는데, 아이들은 그런 시행착오를 조금이나마 덜길 바란다”는 게 지씨의 각오다.
이들로부터 희망을 얻었다고 말하는 전나리(가명·19)양은 “언젠가 사람들은 부모를 잃게 된다. 저희는 그냥 좀 빨리 됐을 뿐”이라며 “보육원 출신은 모두 문제아고 성격이 어두울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자립준비청년=2021년까지 정식 명칭은 보호종료아동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돼 보육원 등 시설에서 나오더라도 보호가 종료돼선 안된다는 지적에 따라 정부는 호칭을 자립준비청년으로 바꿨다. 18~24세에 보육원을 나와 지원금을 받는 5년 동안 자립준비청년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