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엄마도 저를 ‘연진아’라고 부르세요.”(웃음)
배우 임지연(33)은 요즘 자신의 본명보다 ‘박연진’이라는 배역 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며 해맑게 웃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파트2 공개 일주일 만인 지난 17일. 서울 신사동의 인터뷰 자리는 매체들이 몰려들어 기자회견장처럼 붐볐다. “솔직히 작품이 잘 될 거라는 확신은 처음부터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캐릭터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받을 줄은 몰랐죠. 어딜 가나 저를 ‘연진아’라고 불러주시니 너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데뷔 이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그는 벅찬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해 말 파트1 이후 두 달여 만에 공개된 ‘더 글로리’ 파트2는 넷플릭스의 비영어권 TV 부문 글로벌 톱10 순위(6~12일)에서 1억2446만 시청시간을 기록하며 단숨에 1위에 올랐다. 학교폭력 피해자 문동은(송혜교)의 평생에 걸친 복수 이야기가 이토록 커다란 몰입을 부른 데는 가해 주동자인 박연진의 역할이 적지 않다. 박연진은 경찰까지 제멋대로 부리는 부모를 등에 업고, 한 치의 죄책감도 없이 약자들을 짓밟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박연진, 악행에 이유 없는 아이”
뚜렷한 이유가 없는 악인을 자연스럽게 연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 임지연은 “연진이를 이해해 보려고 여러 방면으로 캐릭터 분석을 해봤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며 “사이코패스일까,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그럴까, 고민했는데 결국 자기가 나쁜 짓을 하는 이유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말했다.
“자기 행동에 뚜렷한 이유가 없다 보니 피해자 마음에 공감할 일도,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연진이로서는) 있을 수 없는 거죠. 거기서 출발하니까 말과 대사에 힘이 좀 생기더라고요.”
그런 연장선에서 캐릭터 구축도 “임지연만 할 수 있는 걸 해보자”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기존의 빌런 캐릭터들을 참고하는 대신, 자신이 해석한 고유한 악역, 박연진을 만들기 위해 “내가 가진 목소리와 표정, 걸음걸이를 그냥 가져왔다”는 것이다. “처음 캐릭터를 잡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자연스러워졌다”며 “하루 종일 그 성질머리로 지내다가 집에 돌아오면 미간에 주름이 져 있고 세상 모든 일에 짜증 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고 했다.
“항상 악역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는 그에게 박연진 역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 기회였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미워했으면 좋겠다는 다짐으로 임했다"고 했다. “첫 미팅 때 작가님이 ‘나는 연진이를 미화하는 어떤 서사도 부여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셨는데, 저도 그 말에 무조건 동의했어요. 연진이가 제대로 미움받아야 동은이의 복수에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박연진은 가족에게 버림받아, 자신이 문동은에게 건넸던 “가족이 제일 큰 가해자”라는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임지연은 “죽음을 맞이하는 다른 악역들보다 이런 결말이 연진에게는 최고의 벌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특히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의 조롱 속에 일기 예보를 전하는 연진의 마지막 모습은 실성한 듯 무너져 내리는 복잡한 심리를 실감 나게 드러냈다는 평이 많았다. 그는 “감옥 장면 촬영 때 실제로 마음이 무너져 많이 울었다. 나도 모르게 연진이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찰나처럼 짧았지만 몇 달을 준비한 장면이었는데, 원하는 만큼 표현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타고난 배우 아냐…늘 절실했다”
‘더 글로리’로 칭찬 세례를 받고 있지만 임지연은 영화 ‘인간중독’(2014) 이후 연기력 논란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배우였다. ‘간신’(2015)에서도 연기력보다 19금 노출 연기로 주목 받기도 했다. 이후 드라마 ‘상류사회’, ‘장미맨션’,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파트2) 등에서 묵묵히 연기 폭을 넓혀나갔다. 데뷔 초와 180도 달라진 대중의 반응에 대해 그는 “사실 난 타고난 배우는 아니어서 항상 노력해야 했다”고 했다.
“너무 감사하게도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일찍 데뷔했지만, 당시에는 현장 경험도 없었고 연기력도 부족했어요. 현장에서 정말 많이 혼났지만, 한 번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느리더라도 매 작품 성장하려고 발버둥 치며 절실하게 노력했죠. 그러다 보니 이렇게 큰 칭찬을 받는 날도 오네요.”
임지연은 배우 김태희와 투톱으로 출연하는 차기작 ‘마당이 있는 집’(tvN) 촬영을 최근 마쳤다고 했다. “박연진을 연기한 임지연이라는 생각을 못 하실 만큼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다”며 “이렇게 색깔이 뚜렷한 작품과 역할이 좋다. 앞으로도 다양한 색깔의 캐릭터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은 칭찬을 듣지만, 연기력 논란이 또 찾아올 수도 있어요. (웃음) 아직도 저는 현장이 무섭고 제대로 못 해낼까 봐 불안해요. 하지만 그럴수록 잘해내고 싶은 생각도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좌절을 이겨냈을 때의 성취감, 그게 제가 이 직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