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L 4530은 하루키 문학의 조력자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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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호 24면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지난해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무라카미 하루키. [AP=연합뉴스]

지난해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무라카미 하루키. [AP=연합뉴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올해 초 신간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를 내놓고 수십년간 컬렉션 해온 LP 중 클래식 음반을 소개했다. 오디오 글을 20년 이상 써온 나라고 우쭐대며 가볍게 책을 들었건만, 재밌다. 읽다 보니 그가 소개한 음반들이 사고 싶어졌다. 주변에서도 그 LP를 어디서 사야 하나, 턴테이블을 사고 싶다는 문의가 쏟아졌다. 덕후 제조기 하루키답다.

그의 LP 컬렉션과 함께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그의 오디오다. 그는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에서 ‘오디오 장비는 카트리지를 교체하거나 톤암을 미세하게 조정하면 음질이 더 좋아진다’며 슬쩍 자신의 오디오 노하우를 공개했지만 정작 자신이 사용하는 오디오는 공개하지 않았다. 하루키를 대신해 내가 그의 오디오 인생을 소개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이 점령한 1950년대 일본에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재즈가 확산된다. 하루키와 같은 전후(戰後) 단카이 세대는 10대부터 재즈를 들으며 성장한다. 일본 대표 재즈 뮤지션 대부분이 이때 탄생했다. 대학생이 된 하루키는 재즈바 아르바이트를 하며 재즈에 더욱 탐닉한다. 22세에 결혼한 그는 생계를 위해 1974년 고쿠분지에 재즈바 ‘피터캣’을 개업하고 이곳에서 쓸 오디오를 구입하면서 오디오 순례를 시작한다.

‘재즈는 JBL ’ 지금도 일본서 불문율

옥타브 진공관 앰프 V40 SE. [사진 OCTAVE·이현준·JBL·LUXMAN]

옥타브 진공관 앰프 V40 SE. [사진 OCTAVE·이현준·JBL·LUXMAN]

하루키가 재즈바에서 근무한 1970년대까지는 JBL의 전성기였다.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해외 오디오 수입 시장이 열리면서 오디오 기업 산스이가 JBL을 일본에 소개한다. 일본에선 이때의 ‘재즈는 JBL’ 공식이 지금도 불문율처럼 통한다. 하루키도 재즈바를 오픈하며 JBL을 선택한다. JBL L88 스피커, 산스이 6600 앰프, 데논 DP3000 턴테이블로 첫 시스템을 꾸렸다. 개업 1년차 LP 컬렉션은 900장 남짓. 재즈바로서 소박한 시스템이었다.

그는 재즈바를 운영하며 작가 데뷔를 결심,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 등단한다. 수상 기념 인터뷰 제목은 ‘LP 3000장을 소유한 재즈바 사장’. 그의 독특한 이력은 당시 일본 내에서도 화제였다. 재즈바 사장과 작가의 삶을 병행하던 그는 전업 작가를 선언, 1981년 지인에게 피터캣을 양도한다. 이후 성공한 신인 작가가 된 그는 오랫동안 갈망해온 오디오에 집중 투자한다. 시스템이 완성된 1983년 하루키는 자신의 오디오 시스템을 공개한다.

스피커는 JBL의 4530. 1971년 발표한 모델로 거대한 인클로저에 다양한 유닛을 조합해 쓸 수 있다. 개당 100kg가 훌쩍 넘는 대형기다.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가 하루키를 장시간 인터뷰 후 엮은 책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언급된, 금속 접이 부채같은 것이 달린 하루키의 스피커가 바로 이 제품이다. 재즈를 듣기에 부족함 없는 모델이지만 이후 출시된 4350 시리즈에 밀려 국내외 인기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하루키는 이를 구동하는 앰프로 아큐페이즈, 마란츠, 산스이 3세트를 갖췄다. 턴테이블은 기존의 데논에 영국의 명기 가라드 401을 추가했고, 아카이 릴테이프 데크 DS-5까지 갖췄다. 수입이 늘어난 30대 하루키는 하고 싶었던 오디오를 원껏 즐겼다.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에 재현한 하루키의 오디오 룸. [사진 OCTAVE·이현준·JBL·LUXMAN]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에 재현한 하루키의 오디오 룸. [사진 OCTAVE·이현준·JBL·LUXMAN]

이후 하루키는 좀처럼 자신의 오디오를 공개하지 않는다. 에세이를 통해 레코드를 꾸준히 수집하고 있다는 소식만 전했을 뿐. 이로부터 35년이 지난 2018년에야 인터뷰를 통해 현재의 오디오 시스템을 공개했다. 그의 집은 도쿄 근교 오이소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한 2층 주택이다. 1층에 있는 6평 남짓 공간이 그의 집필실이자 오디오룸이다. 전면에는 스피커 2세트만 놓고 일체의 오디오 기기는 모두 책상 뒤 붙박이 장에 감춘 심플한 설치다. 그가 50여 년간 컬렉션 해온 LP 1만5000여 장이 오른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스피커는 놀랍게도 40년 전 구매한 JBL 4530을 여전히 사용한다. 서브 스피커로 탄노이 버클리를 추가했을 뿐이다. 그는 JBL로 재즈를 듣고 탄노이로는 주로 클래식을 듣는다고 한다. 앰프는 아큐페이즈 E-407, 옥타브 V40SE다. 옥타브는 독일의 진공관 앰프 제조사로 일본에서 인기가 높다. 턴테이블은 스위스 노포 토렌스 TD520, 오디오 애호가 삼성 이건희 회장이 90년대 인수했던 럭스만의 TD-171을 쓴다. CDP는 마란츠 SA-11S3. 부드러운 음이 매력적인 제품이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집필실로 내려와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쓴다. 오전 시간 동안 매일 200자 원고지 20매를 채운다. 오후에는 애플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10㎞를 달리고 오후에는 집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의 루틴에는 음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음악 감상은 침묵의 의미를 지닌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의 시간이 정신 위생에 도움될 뿐만 아니라 창작의 몰입을 돕는 중요한 요소다.” 하루키가 저서에서 늘 강조하는 말이다.

하루키의 40년 메인 스피커 JBL 4530. [사진 OCTAVE·이현준·JBL·LUXMAN]

하루키의 40년 메인 스피커 JBL 4530. [사진 OCTAVE·이현준·JBL·LUXMAN]

하루키 오디오 시스템의 총액은 현재 중고 시세로 3000만원 남짓이다.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그의 수입을 고려하면 소박하다 싶다. 그렇다고 그의 오디오가 평범한 것은 아니다. JBL 4530은 출시 당시 JBL의 기함이자 가장 비싼 스피커였다. 하루키는 자신이 원하는 음을 만들기 위해 스피커의 유닛을 수차례 교체하고 3세트의 앰프를 동원했다. 지식이 부족할 때는 주변 오디오 평론가의 도움도 받았다. 오랜 시간 동안 치밀하게 완성한 후에야 평생 함께할 시스템으로 낙점했다. 이후 하루키는 오롯이 음악에만 몰입했다.

하루키의 오래된 오디오는 그의 예술 세계에 충실하게 기능했다. 이쯤 되면 하루키 문학의 조력자, 그의 오디오 음이 궁금해질 것이다. 반갑게도 그의 음반과 오디오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탄생했다. 2018년 하루키는 그의 책과 음반 1만여 점을 모교 와세다 대학에 기증했다. 이를 한데 모은 도서관 건립을 위해 그의 동문인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디시 회장이 120억원을 쾌척했다.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설계로 일본에서 가장 바쁜 건축가가 된 구마 겐고도 참여했다. 일본 최고의 문학과 건축이 조우한 셈이다. 일본 여행이 해제된 지난 10월 서둘러 이곳을 찾았다.

하루키 오디오룸 동일 브랜드로 재현

럭스만 턴테이블 TD-171. [사진 OCTAVE·이현준·JBL·LUXMAN]

럭스만 턴테이블 TD-171. [사진 OCTAVE·이현준·JBL·LUXMAN]

지난해 개관한 이곳의 정식 명칭은 와세다대 국제 문학관.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이라는 별칭이 더 유명하다. 4호관이라 불려온 오랜 연구동 건물을 리노베이션했다. 정문의 거대한 목조 조형물은 구마 겐고의 시그니처로 하루키 문학 세계로 들어서는 터널을 상징한다. 정문에 들어서면 3층 높이의 책장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지하 1층에는 그의 오디오룸이자 집필실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았다. 사진에서 협소해 보였던 그의 공간은 실제로 보니 음악을 듣기에 부족함 없이 넉넉했다. 전용 오디오룸을 꿈꾸는 이들이 참고하면 좋을 사이즈다. 하루키는 이 공간을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턴테이블과 CD 플레이어를 손수 가져다 놓았다.  이곳에서 그의 시스템을 들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곳은 유리벽 밖에서 관람만 가능할 뿐 오디오 감상은 불가능하다.

아쉬움은 1층 오디오룸에서 달랠 수 있다. 20평 규모의 넉넉한 공간에서 하루키가 피터캣 시절부터 소장해온 LP를 감상할 수 있다. 오디오 시스템은 그의 친구 이자 오디오 평론가인 오노데라 코지가 감수를 담당해 JBL, 소너스 파베르 스피커, 아큐페이즈 앰프, 럭스만 턴테이블로 구성했다. 같은 제품은 아니지만 하루키 오디오의 에센스를 전달하기 위해 동일한 브랜드로 조합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루키가 엄선한 음반을 푹신한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감상하며 오전을 보냈다.

수많은 뮤지엄을 방문했지만 한 예술가의 오디오룸을 재현한 사례는 보지 못했다. 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에 그의 오디오가 끼친 영향이 크다는 의미다. 전 세계 수많은 팬들이 그의 음반과 오디오를 경험하기 위해 매일 이곳을 찾는다. 이런 관점에서 하루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디오 애호가가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면 이곳을 찾아 그의 음악과 오디오 세계를 탐닉하길 권한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될 것이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한국 오디오 문화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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