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종료 선언 검토" 미국 왜 꺼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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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대표 해리슨 중장(左)과 남일 북한인민군 대표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이 협정은 곧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지 못해 휴전상태로 계속돼 역사상 가장 긴 휴전상태로 기록되고 있다.[중앙포토]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한국전 종료 선언 검토'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북.미 간의 교전 상태를 청산하는 의미가 있다. 이는 양측이 평화협정을 맺고 관계를 정상화하는 첫걸음이다.

북.미 양국이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할 경우 1953년 7월 이후 53년간 국제법적으로 정전(停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반도 상황을 종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북한은 물론 북.미 관계와 동아시아 정세 전반에 미칠 파장이 엄청나다.

◆ 왜 이 시점에 꺼냈나=한국전 공식 종료 선언은 미국이 북한에 줄 수 있는 최상의 인센티브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북핵 포기'라는 전제가 있지만 미국이 북한에 빅카드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 체제가 그간 가장 염려해 온 건 미국의 공격으로 인한 체제 붕괴다. 부시 대통령과 미 행정부 관리들이 "대북 군사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다"고 여러 차례 밝혔지만 김정일 정권은 미국의 공격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들이 핵실험을 하면서 내세운 명분도 미국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전 공식 종료라는 카드를 보여준 건 6자회담 재개를 앞두고 북한 정권의 불안을 해소해 주겠다는 의도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북한과 제대로 된 협상을 할 수 없다고 백악관은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명분상으론 북한이 요구해 온 '해외계좌 동결 해제' 못지않은 큰 카드를 던진 셈이다.

이는 부시 대통령의 고민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라크전의 수렁에 빠져 중간선거에서 참패한 공화당의 부시로서는 레임덕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제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입장이다. 이라크에선 아직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 가운데 북한이 일단 6자회담 테이블에 앉겠다고 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부시 대통령이 6자회담 재개를 앞둔 시점에서 북한이 가장 바라는 카드를 보여준 건 이런 맥락에서다.

지난해 6자회담에서 발표된 '9.19 공동성명'은 제4항에서 "6자는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공약했다.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핵 포기가 이뤄지면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의사를 이번에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번 언급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을 포기할 수 있도록 명분을 준 것이란 관측도 가능하다. 또 부시 행정부의 대북 압박에 대한 한국 내 일각의 부정적 여론을 고려한 것이란 측면도 있다. 스노 대변인이 이 제안을 두고 "남한 사람들에게도 적절한 안도감을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한 데서 이런 점을 엿볼 수 있다.

◆ 한.미 양국 공감대 이뤄진 듯=스노 백악관 대변인의 언급이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 간의 아태경제협력체(APEC) 양국 정상회담 직후 열린 공식 브리핑에서 나왔다는 점에 전문가들은 주목한다.

두 정상이 북한 핵문제 해법을 논의하면서 이 문제를 언급했고 특히 노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의 설명에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는 미국 측의 설명은 의미가 있다. 일단 한.미 간에 평화협정 체제로의 전환과 관련한 원칙적 입장에는 공감대가 이뤄졌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실현 가능성은 있나=하지만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는 험난한 길을 가야 할 긴 여정으로 봐야 한다고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북한의 74년 첫 주장 이후 끊임없이 논란이 벌어졌던 사안인 평화협정 체결문제는 새로운 화두가 아니다. 북.미 간은 물론 한반도 관련국들 사이에서도 수차례 거론돼 왔다.

특히 2000년 10월의 북.미 공동 코뮈니케는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 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가 있다는 데 대해 견해를 같이했다"고 강조했다. 이제 새로운 다자대화의 틀인 6자회담이 그 바통을 이어받게 됐다.

평화체제와 관련한 논의가 시작되려면 북한의 핵 폐기라는 혁명적인 한반도 정세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핵 폐기가 쉽게 이뤄질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올 5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선(先) 핵포기 결정, 후(後) 평화협상"을 주장하자, 한성렬 당시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는 "우선 (미국과)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관계 개선을 해 나가면서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이 순서"라고 맞서기도 했다. 북한은 지난달 핵실험 이후 미국 등 국제사회를 향해 핵 보유국으로서의 위상을 주장하며 핵 카드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기세다. 앞으로 북한과의 협상이 녹록지 않을 거란 것이다.

한.미 군사동맹 관계의 재조정,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 우산 제공 문제 같은 핵심 현안들의 가닥이 함께 잡혀가야 할 문제다. 이런 사정 때문에 부시 행정부의 한국전쟁 종료선언 검토 언급은 단기적인 이행 방안을 염두에 뒀다기보다는 북한 핵 폐기와 한반도의 안정적 관리를 위한 장기과제를 제시한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서울=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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