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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사 첫 대통령 시정연설 보이콧한 야당, 편협한 시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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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호 22면

콩글리시 인문학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 1095년 11월 클레르몽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이렇게 외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는 기독교도들을 감동시켰다. 그의 연설은 유럽 전역의 제후 영주 국왕으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얻는다. 이를 계기로 예루살렘 성도 탈환을 위한 십자군이 탄생한다. 일신교의 순례는 일상의 수많은 죄를 한꺼번에 씻고 구원을 받는 일생일대의 장정(長征)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이슬람교도들은 메카로 떠난다. 이후 200년이 넘게 기독교 전사들과 이슬람 측은 격렬한 전투 속에 공방을 벌인다. 8차에 걸친 십자군과 지하드의 결사항전은 인류역사에 큰 상흔을 남겼다. 십자군 원정은 성지 탈환이 목적이었지만 그것은 무력을 동반한 일종의 성지순례였다.

우리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서 십자군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지하드에 박수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문명 이전의 중세 암흑시대는 우군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했다.

그로부터 1000년 가까이 지난 2022년 10월 25일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은 중세 암흑시대를 연상시켰다. 야당은 의사당 밖에서 피켓(picket) 시위를 했다. picket은 시위푯말이 아니다. 항의하는 사람을 칭한다. 그리고 picketing은 항의하는 행동이다. 손에 든 handbill이나 placard를 피켓이라고 부르는 것은 콩글리시다. 내년 시정 방향에 대한 대통령의 연설에 박수 치고 환호한 것은 여당 의원들뿐이었다. 헌정 사상 초유로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보이콧을 당했다.

이 반쪽짜리 시정연설은 두 동강 난 우리 정치상황을 상징한다. 이를 두고 대통령은 “30여년 간 헌정사에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져 온 게 어제로부터 무너졌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십자군 원정 당시 교황은 ‘불신앙의 무리와 타협이나 강화(講和)를 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 입장이었지만 기독교 측의 프리드리히와 이슬람 측의 알 카밀 사이에는 종교적 독선을 극복하고 역사적 강화조약이 타결됐다. 강화의 유효기간은 10년이었으나 향후 30여년 순례와 통상이 목적인 사람들의 왕래는 서로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게 됐다.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현실의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보이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이렇듯 사람들은 두 눈을 갖고 있으나 한 눈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이렇게 외눈박이 사회(one-eyed Jacks society)로 변했다. 말론 브란도가 감독·주연한 영화에 ‘애꾸눈 잭’이 있다. 이 영화의 잭은 사악한 인간의 거짓과 이중성의 심벌이다.

반면에 애꾸눈을 가졌지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도 많이 있다. 사이나이 전투의 영웅 모세 다얀, 한니발 바르카, 넬슨 제독 그리고 삼국지에 등장하는 하후돈이 그 예다. 이들은 외눈을 가졌지만 두 눈 가진 자들보다 통찰력과 지혜, 용기가 훨씬 앞섰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오딘(Odin)도 애꾸눈이었다. 지혜와 전쟁의 신 오딘은 지혜를 얻기 위해 지혜의 샘물을 지키는 미미르에게 한쪽 눈을 바쳤다. 오딘은 비록 외눈박이였으나 보통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밤과 죽음의 세계까지 내다보는 지혜를 얻게 된다. 우리들의 눈은 둘인데 어쩌다 모두 한쪽만 보는 애꾸눈이 되었을까?

김우룡 한국외대 명예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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