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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옷 입어 체포"…박해 피해 韓 온 무슬림 트랜스젠더 운명 [그법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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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법알 사건번호 100] "여자 옷 입었다고 체포됐다"…박해 피해 한국 온 무슬림 트랜스젠더

말레이시아인 A씨는 지난 2017년 서울출입국·외국인청에 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했습니다.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성 정체성을 지키고 살아가고 싶은데, 말레이시아에서는 무슬림인 A씨가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A씨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지만, 10살 무렵부터 여성으로서의 성 정체성이 형성됐다고 합니다. 이후 10대 때 여성호르몬제를 투약하고, 20대 중반에는 가슴보형물 삽입 수술을 하는 등 본인의 성 정체성을 좇아 살아왔죠. 몇 년 뒤 가슴 보형물은 부작용 때문에 제거해야 했지만, 여성의 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 등 자신이 느끼는 정체성을 계속해서 표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행동으로 인해 말레이시아에서 구금형 처벌을 받는 일이 생깁니다. 지인이 연 파티에 갔다가 '크로스 드레싱(cross-dressing)', 즉 생물학적 남성이면서 여성의 복장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건데요.

이슬람교를 국교로 두고 있는 말레이시아에는 무슬림만을 대상으로 한 샤리아법원이 있습니다. 무슬림인 국민에게는 말레이시아의 법률 외에도 이슬람법인 샤리아가 이원적으로 적용되는 겁니다. 종교의 자유 역시 무슬림에게는 제한됩니다. 무슬림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기 위해서도 샤리아 법원의 판결을 거쳐야 한다는데요.

A씨 역시 샤리아 형법에 따라 7일간의 구금형, 950링깃(약 29만원)의 벌금형이 선고됐고, 실제로 3일간 수감 생활을 한 후 석방됐습니다. 이 일을 겪은 A씨는 말레이시아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호주행을 시도했지만 서류 미비 등으로 실패했고, 지난 2016년 한국을 찾았습니다. 이후 세 차례 정도 말레이시아와 한국을 오간 뒤 2017년 난민 지위를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19년 서울출입국·외국인청이 거부하자, 법원에 이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냈죠.

관련 법령은?

난민법에 따라 법무부장관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에 대해 난민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난민협약 등에 따르면 '박해'란 '생명, 신체 또는 자유에 대한 위협을 비롯해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나 차별을 야기하는 행위'를 뜻하고요.

A씨 측은 트랜스젠더라는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무슬림 사회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지난 2020년 말레이시아 종교부는 동성 간 성관계 처벌 형량을 올리고, 트랜스젠더 관련 콘텐트를 제작하거나 공유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는 샤리아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거든요.

1심 “여성복 입고 직장생활” 거부, 항소심 뒤집은 이유는?

1심 재판부는 A씨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은 결정에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말레이시아가 크로스 드레싱과 관련한 처벌 규정을 두고 있고, 최근 정부도 트랜스젠더에 관한 제재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는 한다"면서도 A씨가 말레이시아에서 보낸 일상에 주목했습니다.

A씨가 신분증이나 여권에다 여성스러운 얼굴을 한 사진을 사용해도 별다른 문제를 겪지 않았던 점, 여성복을 입고 화장을 한 채로 취업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한 겁니다. 재판부는 "말레이시아로 돌아갈 경우 사회의 특정 세력이나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A씨가 2016년 10월 처음으로 한국에 왔지만 말레이시아와 한국을 세 차례 더 오간 뒤 2017년 10월에야 난민 인정 신청을 한 점도 짚었습니다. A씨에게 박해를 받을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를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판단은 법원에서 뒤집혔습니다. 지난 18일 서울고법 행정1-2부(김종호 이승한 심준보 부장판사)는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서울출입국·외국인청의난민 불인정처분을 취소한다고 밝혔습니다.

2심 재판부는 A씨가 트랜스젠더임을 밝힌 채 평범한 직장생활 등을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박해가 없다"고 단정 짓기 힘들다고 본 건데요. 특히 재판부는 유엔난민기구가 성 정체성과 관련한 난민 신청자들에 대해 발간한 해석 지침을 참고했습니다.

해석 지침은 "성적 지향 또는 성 정체성은 선천적이거나 바꿀 수 없는, 또는 포기하거나 숨기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되는 정체성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어떤 사람이 어떤 국가에서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을 근거로 고문, 박해, 기타 잔혹하거나 비인도적이며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에 대한 충분한 근거 있는 두려움을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면 해당 국가로 이주, 추방, 인도해서는 안 된다"면서요.

2심 재판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실제로 처벌을 받은 A씨가 국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라면서 "이런 위협이 부당한 사회적 제약 정도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체나 자유에 대한 위협,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나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에 '박해'가 맞는다는 겁니다.

게다가 앞서 A씨에게 선고된 것은 7일간의 구금형이었지만, 앞으로 더 큰 형벌을 받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재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3개월 이하의 징역형으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들이 수감 생활 도중 성적 학대를 받는 일도 종종 생기고요.

재판부는 A씨 신분증에 무슬림이라는 종교와 남성이라는 성별이 명시돼 있어, A씨가 여성스러운 옷차림을 할 경우 경찰이 신분증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처벌 위험에 노출된다고 설명했습니다. A씨로서는 말레이시아에서 살아가면서 박해에 노출될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를 가졌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는 "성 정체성에 대한 박해를 근거로 난민을 인정한 첫 법원 판결"이라며 "이 판결을 계기로 난민 인정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는 환영 입장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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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법’을 콕 집어 알려드립니다. 어려워서 다가가기 힘든 법률 세상을 우리 생활 주변의 사건 이야기로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함께 고민해 볼만한 법적 쟁점과 사회 변화로 달라지는 새로운 법률 해석도 발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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