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1만원으로 책 50권 내용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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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회사에 다니는 이민혁(32.직장인) 씨는 출근하는 즉시 '북코스모스(도서요약 서비스 사이트)'에 접속해 10장 가량으로 압축된 책 요약본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그가 읽은 책은 '솔로몬 부자학 31장'. 이씨는 "재테크나 전략서.자기계발서는 내용이 방대해 무게만으로도 압박을 느낀다"며 "간략하게 알짜 내용만 압축한 요약본을 읽는데는 무리가 없고 내용이 쏙쏙 들어온다"고 말했다.

책이 진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정보입수 통로였던 책이 인터넷과 융합하거나 크기와 구성을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변신하고 있다.

북코스모스.북짚.매경독서클럽 등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책 요약본이 직장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요약본이란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10-15장 분량으로 정리해 볼 수 있는 서비스를 말한다. 북코스모스의 경우 요약본을 이용하는 단체회원수가 삼성전자.현대기아자동차.SK텔레콤.KT.GS건설.포스코.국민은행 등 110개 기업 및 공사와 80개 정부기관, 10개 대학 및 시립 도서관 등 200여곳에서 이용하고 있다.

이는 작년에 비해 11% 이상 급증한 것이다. 북코스모스의 임진택 팀장은 "일반회원뿐 아니라 업무에 바쁜 직장인들이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요약본 책을 읽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손에 들고 다니기 편한 4×6 크기의 신간 단편이나 수필.금융.재테크 정보 등 권당 2000원에 판매되는 책도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책들은 자판기를 통해 판매된다. 한국철도유통은 "지난 5월 영등포역과 제물포역에 처음으로 책 자판기 2대를 설치한 후 매출이 꾸준히 늘어 전체 철도역사로 자판기 확대 설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최근 밝혔다.

이에 따르면 지난 7월 신길역.신도림역.부천역에 추가로 비치하자 두달 사이 13배 가량 판매액이 늘어났고 10월 옥수역.외대역.구로역 등 23대까지 늘린 결과 판매액은 5월보다 무려 60배까지 늘어났다. 조만간 대학병원.터미널.고속도로 휴게실.공항.전철.군대 내무반 등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범우문고.살림지식총서.책세상.대원사 등의 출판사들도 꾸준히 군살 빠진 문고본을 내놓고 있다. 살림출판사의 강훈 팀장은 "2003년 출간 이후 인문.과학.실용문고본이 꾸준히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작은 책 "편리하다, 빠르다, 싸다"

블루오션으로 각광받는 이들 책은 어디서나 편리하게, 시대가 요구하는 내용으로, 저렴한 가격에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책 자판기를 발명한 출판컨설팅 '김&정'의 김영수 실장(출판평론가)는 '작은 책'이 출판시장의 블루오션으로 우리 시대의 트렌드를 정확히 꿰뚫었다고 말한다. 그는 "전국 1만3000여곳에 달했던 지역서점은 현재 2000여곳이 안될 정도로 줄어 그만큼 책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었다"며 "책 한 권을 사더라도 대형서점까지 가야 하는 수고와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자판기 책은 지하철이 있는 곳이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거리적 기능과 2000원의 싼 값에 비해 가치있는 콘텐트가 장점"이라고 말했다.

또한 책 부피가 두껍고 과대포장된 책이 좋은 책이라는 문화적 허영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신용카드 결제도 가능해 편리함이 더해졌고 책의 유통기한이 짧아 그때그때 새로운 트렌드성 내용을 추가할 수 있는 민첩성도 추가됐다.

살림출판사의 강훈 팀장은 "문고본은 독서 생활화와 독서인구 저변 확대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에 유통 통로를 대형서점에 제한시킬 것이 아니라 홈쇼핑이나 자판기.편의점 등으로 넓힐 것을 검토중"이라며 "구조상의 변화가 문고본 확장에 한 몫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코스모스의 임진택 팀장은 "한 달에 1만원이 채 안되는 돈으로 50여권의 책 요약본을 볼 수 있어 좋은 책들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점이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경제 악화땐 '부자', 삶 힘들땐 '자기계발' 뜬다

<사진>1호선 신길역에 비치된 책 자판기

책 자판기에 현재까지 꽂힌 책은 40여권으로 '포기하지마라', '부자들에겐 뭔가 특별한', '악인들의 리더십', '부자들의 수첩', '워렌버핏', '빌 게이츠' 등이 있다. 범죄 등이 사회현상으로 나타날 땐 '희망'이, 경제생활이 팍팍할 땐 '부자'나 '리더십'과 관련된 책이 잘 팔리고 있다.

이상문학상을 탄 박상원 단편집이나 '연시(戀詩)-사랑시 모음' 등 인문학 서적의 판매도 꾸준하다. 책 자판기 마니아들의 요구 끝에 공지영 작가의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가 올 12월에 나올 예정이다. 구효서.은희경 씨 등 인기 작가들의 작품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북코스모스에서 인기리에 클릭되고 있는 책은 '지루하게 말해 짜증나는 사람 간결하게 말해 끌리는 사람', 'Fun(뻔) Fun(뻔)으로 혁신한다', '버리는 기술 Simple Life' 등이다. 분류상 변화나 혁신.자기계발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원 테마.원 키워드로 '알짜 정보'만 압축

전문가들은 이들 '작은 책'이 도서시장 위기의 틈새를 정확히 짚어냈다고 말한다. 살림출판사의 강훈 팀장은 "인터넷을 이용하는 인구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비주얼과 요약적인 측면이 강화됐다"며 "이 과정에서 굳이 두꺼운 책을 사서 보는 것이 아니라 검색형 독서로 자기가 필요한 정보만을 압축해 요약한 것을 즐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상황이 이렇게 되니 책은 작아질 수밖에 없고 독자에게 더 가깝게 가기 위해 유통구조도 지하철이나 편의점 등으로 확산되는 등 책 나름대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제는 '원 테마.원 키워드'가 대세라는 지적이다. 아이템이 구체화하기 시작하면서 책 속의 차례에 들어가 있던 각 장이 이제는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바뀌고 있는 실정. 정보의 속도성에서는 페이퍼콘텐트가 인터넷콘텐트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책세상의 문선희 차장은 이와 함께 "책의 사이클 타임도 짧아지고 있어 두꺼운 책으로는 이런 변화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며 "꼭 필요한 내용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책의 경쟁력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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