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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한때 인구 20%가 승려…지금은 명맥만-라마교 사원파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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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몽골의 종교는 우선 샤머니즘과 라마교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샤머니즘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라마교도 외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외관에 단 하나 남아있는 칸탄샤(칸탄사)를 통해 겨우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칸탄샤란 큰 사원이라는 뜻이다. 칸탄샤는 외몽골 최대의 라마교 사원으로 이 나라종교의 중추가 되었던 곳이다.
외 몽골에는 한때 7백개가 넘는 라마교 사원이 있었고, 인구의 20%정도가 라마승이 있다하니 라마교의 위세가 어떠했는지 가위 짐작된다. 그러나 1921년에 외 몽골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중국 영으로부터 독립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면서부터 라마교는 종교탄압정책으로 억제되어오다 1937∼l938년 사이에 종교인과 지식인들을 처단할 때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칸탄사만 남아>
이때 처형된 사람이 무려 10만명선에 이르렀다 한다. 현재 외 몽골의 인구가 2백만명인데 당시에는 1백만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지키다, 그리고 지식인이란 이름아래 무참하게도 죽어갔는지 이 나라의 사회주의 돌풍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해 10월 외 몽골이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유주의 노선을 밟으면서 라마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0만명 처형당해>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80㎞떨어진 즈모드지방의 만체스라는 곳에 황량한 라마교사원의 폐허지가 있다. 약간 경사져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넓은 산기슭에 덩그렇게 흰색의 「겔」(둥근 이동식 텐트)이 두 채 있고, 그 주변에 석인상과 돌로 조각된 양과 염소상, 그리고 커다란 맷돌 짝들이 있다. 커다란 겔 안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라마승려들이 제의에 열중하고 있었고, 또 하나의 다른 겔에서는 라마승려 두 명이 윗통을 벗어 젖히고 끓는 기름에 둥근 밀개떡 같은 것을 열심히 튀겨내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라마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칸탄샤를 찾았다. 아침불공에 참여하는 신도들과 그것을 보러 온 관광객들로 칸탄샤는 초만원이었다. 승려들은 몽골 특유의 황색 「딜」에다 붉은 색 가사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둘러 늘어뜨리고 머리마저 황색 벙거지를 썼다. 상주하는 2백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왔다 갔다 하니 칸타샤 주변은 온통 주황색 꽃밭처럼 화려했다. 게다가 신도들마저 황색이나 주황색의 딜을 입고 목화 같은 「궈타라」라는 신을 신어 칸탄샤 주변은 한층 더 붉게 보였다. 지붕에 기와를 얹고 들보마다 단정한 것은 우리나라의 절과 닮은 데가 있지만 벽이 모두 붉은 데다 그 내부가 붉게 장식되고 그 속에 붉은 가사를 두른 승려들이 꽉 차게 들어앉아 있어 칸탄샤는 안과 밖이 온통 붉게만 보였다.
오전 9시가 되자 바깥의 높다란 망대 위에서 승려 한사람이 네 방향으로 한차례씩 「브레」를 불고 사원 안의 불전에서는 여덟 명의 승려가 앉아 5m나 되는 긴 나팔인 브레를 잡고 부는데, 여기에 맞춰 동발을 치며 징과 같은 「봄부르」가 댕댕 울리고 승려들이 말 젖을 발효시킨 「애락」을 한 대접씩 앞에 놓고 앉아 라마경을 구송 한다. 칸탄샤의 제의는 소제와 대제로 구분되어 소제는 매일 오전 9시에서 오후 1시까지 올리는 상제고, 대제는 불탄일과 1월1일(태음력)에 대대적으로 올리는 특별제의다. 그 외에 신도들이 찾아와 올리는 개별적인 제의가 있다.

<애락 놓고 경 외워>
칸단샤 뜰 한 모퉁이에서는 신도들이 「아스」라 부르는 향 가루와 성수를 배급받느라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아스를 불에 피워 연기를 쏘이고 물(성수)을 몸에 바르면 잡스런 기가 물러가고, 병이 낫고, 몸과 정신이 청결해진다하여 신도들이 몇 시간씩이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본전 뒤쪽의 부다 사리탑인 「솔루로강」앞에서는 신도들이 이마가 벗어지도록 연거푸 땅바닥에 엎드려 배를 깔고 두 다리를 곧게 쭉 뻗고 한동안 있다가 일어나는 절을 헤아릴 수 없이 계속 반복하다가 어정어정 걸어, 또 사리탑을 수없이 돌며 이마를 매번 사리탑을 둘러친 목책에 댔다 돌곤 했다.
울란바토르에서 10㎞ 떨어진 곳에서 걸어 이곳에 왔다는 58세 된 사강후라는 여인은 엎드려 절을 할때마다, 그리고 사리탑의 목책을 돌며 기둥에 이마를 댈 때마다 자기부부와 7남매가 잘살게 되고, 또 내세에 가서도 좋은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빈다고 했다.
라마교는 티베트 불교라고도 하는데 불교가 인도에서 티베트를 거쳐 17세기께 몽골에 들어왔고, 석가모니 부처를 신앙한다. 부르간 스님은 부다가 신앙 방법에 따라 「마야나부다」와 「히니아나부다」로 구분되는데 라마교는 마야나부다를 신봉하는 티베트계의 옐로(yellow)부디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을 들으며 승려들과 신도들이 대체로 황색의 딜을 입고있던 것이 생각났다.
칸탄샤는 1893년에 중건 되였고 재적 슬려는 2백명이며 라마승을 길러내는 승려학원을 가지고 있다. 현재 재학생은 40명이 있고 5년간의 수학과정으로 불교사·불교철학·티베트어·불교미술·라마교 의식 등을 수학한 다음에 라마승으로 입문한다. 승려학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제2급 학교(중학과정·6년제)를 졸업하고 나이는 18세가 넘어야 한다. 재학생 중에는 몽골어를 쓰는 변방의 「부리야트」족이 대부분이고, 개중에는 외 몽골족도 약간 있었다. 과거에는 라마승이 독신으로 살아야하는 계율 때문에 라마승이 인구의 2할을 넘는 이 나라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인구가 감소되고, 또 그 많은 승려와 사원을 유지하는 비용을 부담하느라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된 원인중의 하나가되기도 했다.

<헌금·원조로 유지>
라마승들의 생계는 신도들이 바치는 헌금과 말 젖을 발효시킨 애락, 곡물 등으로 꾸려나가는데 외국의 원조와 정부의 보조금도 미약한 대로 도움이 된다.
울란바토르에 칸탄샤 하나만이라도 남겨둔 것은 라마교의 명맥을 명목상으로나마 유지시켜주려는 명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몽골에는 그 나마의 명분마저 잃어 올더스지방의 칭기즈칸 묘에나 가야라마승들 몇십 명이 칭기즈칸 묘의 한 귀퉁이에서 기거하며 아침마다 양젖에 보릿가루를 반죽해 튀겨낸 「고위스」와 양젖을 끓여 만든 유다를 바치고 라마경을 외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종교탄압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쫓기며 숨어 살던 승려들이 이곳의 대제 때면 걸승인 「참」으로 나타나 라마교 특유의 동물가면을 쓰고 티베트 문자의 축귀를 상징하는 자획을 그으며 춤춘다. 과거에 위세를 떨쳤던 라마교가 내 몽골에서도 또다시 기지개를 켤 날이 있을 것인지, 아마도 그날은 멀기만 한 것 같았다. 【글 김태곤 교수(경희대·민간신앙) 사진 주기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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