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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총재의 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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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효성 기자 중앙일보 기자
안효성 금융팀 기자

안효성 금융팀 기자

한국은행이 이보다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을까. 기준금리 등 통화정책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치솟는 물가에 한은의 금리 인상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도 쉽지 않다. ‘인플레 파이터’ 본능을 충족하는 데 이보다 좋은 시기는 없다.

중앙은행 총재의 입도 전 국민이 바라보게 됐다. 게다가 그 입의 주인공도 화려한 경력과 전문성을 자랑하는 이창용 총재다. 이 총재는 “당분간 0.25%포인트의 점진적 인상이 적절하다” 등의 솔직한 발언을 쏟아낸다. 모호성을 뒀던 전임 총재와 다른 직설 화법이다. 금융권에서는 예측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긍정적 평가가 많다.

다만 발언이 쌓일수록 반대 의견도 늘고 있다. 이 총재는 지난달 25일 기자간담회에서 “연말 이후론 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투자한 사람들은 자기책임하에 손실이든 이익이든 모두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총재가 직접 나서 시장에 경고성 메시지를 던질 줄 몰랐다”며 “이 총재의 발언 때마다 채권금리가 급등하는 등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어 부담된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5일 기자간담회에서 기준금리 인상 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5일 기자간담회에서 기준금리 인상 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달 27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한은의 통화정책은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했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다”며 “한은이 Fed보다 먼저 금리 인상을 종료하기는 어렵다”는 말을 꺼냈다. 한국의 통화 정책, 특히 한·미 금리 역전 등으로 원화가치가 요동치는 상황에서 Fed 행보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건 맞다. 다만 통화당국의 수장 입에서 한은의 ‘비독립’ 선언이 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 총재는 그동안 한·미 금리 차가 물가에 미치는 영향에는 관심을 두되, 통화정책은 한국 물가에 중점을 두겠다고 해왔다. 불확실성이 큰 시기에는 이런 사소한 차이에도 시장의 움직임이 클 수밖에 없다.

역대 한국의 중앙은행 총재들은 말을 아끼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발언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 전략적 모호함을 소통의 덕목으로 삼기도 했다. 향후 경제의 불확실성이 클수록 더 그랬다. 본인이 한 말이 언젠가는 ‘말빚’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Fed에 맞서지 말라’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자본시장에 미치는 힘이 그만큼 강해서다. 굳이 자본시장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한은에도 맞서지 말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치솟는 대출금리에 한은의 위력을 체감하는 이들도 많다. 이 총재의 말의 무게도 그만큼 무거워졌다. 무거운 말도 많이 쏟아지다 보면, 언젠가 그 무게가 점차 가벼워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