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당은 누구의 정당인가/송진혁(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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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요즘 민자당의 돌아가는 꼴은 차마 눈뜨고 못볼 지경이다. 그동안 찢어지고 구멍난 누더기로나마 옷을 걸친 시늉을 하는 것 같더니 이번 내분에서 보면 그나마도 팽개치고 그냥 알몸을 다 내놓고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민자당의 밑천,민자당 지도부의 알몸이 다 나오고 있다.
평소 그토록 근엄하고 거룩하게(?) 보이던 소위 지도자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고,보통사람들이 들켜도 낯을 붉힐 더블 플레이의 명수들인가 하는 것이 백일아래 들통났다.
내각제를 추진하기로 서명까지 해놓고도 겉으로는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고 한 것이나 야당이 반대하면 내각제는 유보라는 말만 몇달씩 되풀이한 것이 다 무엇이겠는가.
전에도 민자당은 한다고 했다가 안한 것이 많고,안한다고 했다가 한 것도 많은데 이번 각서파동에서도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하기로 한 것을 유보키로 했다고 했으니 민자당의 말은 이제 거꾸로 들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또 민자당의 풍속이 그런지는 몰라도 안들키면 끝내 우긴다는 것도 있고 들켜도 본질보다는 발설을 중시한다는 것도 볼 수 있다. 지난 번 보안사 사찰사건 때도 사찰자체보다는 자료유출이 더 문제라는 말이 나오더니 이번 각서 파동에서도 각서 자체보다는 그 유출을 더 문제삼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요즘 민자당에는 해괴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고 개탄할 만한 현상은 이번 내분에서 여지없이 나타나고 있는 그 비민주성이 아닌가 싶다.
당초 3인 지도자가 밀실에서 3당통합을 전격 결정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민자당이란 통합정당을 만들고 그 안에 당의 의사를 결정짓는 기구와 절차를 마련한 이상 형식상으로나마 그런 기구와 절차를 통해 당론을 결정해야 할텐데도 내각제의 경우 그런 흔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내각제 추진이란 당의 가장 중대한 목표를 설정하는데 있어 전당대회ㆍ의원총회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흔한 당직자 회의나 중집위 한 번도 없이 3인 지도자가 비밀리에 합의하고 비밀리에 각서를 만든 것으로 그 뿐이었다.
민자당의 목표가 내각제에 있음을 천하가 다 알게 됐지만 소속의원들이나 일반 당원들은 풍문으로 들었거나 눈치로 짐작하거나 수군수군 귀동냥으로 알게됐을 뿐 공식적으로 통고받은 바도 없고 의견 한 번 낼 기회도 갖지 못했다.
뿐만 아니다. 내분이 진행되면서 3파간에는 초대총리는 누구에게 주기로 했다,대권후보는 보장 못 한다,당권을 달라 못 준다,국회의원 공천권 51%를 내라 못 낸다 하는 말들이 어지럽게 나돌고 있다.
대권ㆍ당권ㆍ공천권 같은 어마어마한 권력이 마치 몇몇 사람들의 주머니속 물건처럼 협상대상이 되고 흥정거리가 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민자당의 국회의원쯤 되는 사람들이나 호왈 수백만 당원은 모두 허수아비인가. 이쯤되면 민자당이 국민정당인지,전당원의 정당인지,소수보스의 정당인지 알 길이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국민과 전체 민자당원의 의사로 결정해야 하고,최소한 소속의원 정도는 결정과정에 끼어드는 시늉이라도 있어야할 대권후보ㆍ총리후보와 당권향방ㆍ공천권 행사가 몇 사람의 밀고 당기기로 결정될 수 있는 문제인가.
그럼에도 민자당에는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고 그런 현상을 보고도 당내에서는 이렇다 할 항의조차 없다. 자기들이 바지 저고리가 되고 허수아비 취급을 받게된 것을 알면 흥분도 하게되고 속도 상할텐데 민자당의 그 많은 인물들은 얼마나 수양이 깊은지 별 동요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같은 당을 하는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민정계 사람이라도 민주계 편을 들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있을 수 있는데,또 으레 그런 현상이 나와야 옳은데 민자당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파가 얼마나 죽을 쑤고 욕을 먹더라도 따라만 간다. 각서가 있어도 없다하면 없는 걸로 치고,내각제다 하면 내각제로,유보다 하면 유보로,포기다 하면 포기로 간다.
이 얼마나 무서운 무쇠조직인가. 2백여 명 국회의원이나 수백만 당원이 모두 새끼에 묶인 돌멩이격일 뿐 주견도 인격도 설 땅이 없다.
따지고 보면 민자당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당을 민주화하지 않는 한 밥그릇을 둘러싼 보스간의 명분도 체면도 없는 내분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번엔 설사 민자당이 내분미봉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해다툼이 격렬해질 선거가 가까워 올수록 더 치열한 내분이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소속의원과 당원들을 새끼에 묶인 돌멩이 쯤으로 보기에,또 그런 당풍토이기에 물어봐야할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전격적으로 합당하고 비밀리에 각서를 쓰고 당권ㆍ공천권을 밀고 당기는 게 아닌가.
아마 내색은 않더라도 많은 민자당 국회의원들과 당원들이 이번 사태를 창피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분란은 지도부가 일으킨 것이지,당원들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럼에도 사태를 이지경으로 만든 지도부는 책임을 느끼는지 안느끼는지 아무런 인책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뒤늦게 3김퇴진론이 나왔지만 얼마나 체중이 실려있는지 아직은 두고볼 밖에 없다.
민자당 지도부는 이제 와서 내분수습을 위해 당권을 어떻게 하고 지도체제를 어떻게 한다는 등으로 묘수를 찾는 모양이지만 그렇게 어렵게 헤맬 필요가 없다. 간단한 방법이 있다. 이런 사태를 만든 지도부가 모두 사표를 내라. 그리고 당원들의 뜻을 물어라.
당민주화 없이는 민자당이 언제까지 가도 가건물신세를 면할 길이 없고 더구나 정권재창출은 어림없는 일이다.<편집국장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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