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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세계 4억명 식량을 미끼로 협박…영토 양보협상 없다"[주한 우크라이나 대사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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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의 출구는 어디일까. 미국·유럽이 합심한 초유의 대러시아 경제제재 속에 전쟁이 장기화 하면서 각국이 에너지·식량 수급 불안에 떨고 있다. 서방 일각에선 종전 협상 조건을 놓고 엇갈린 목소리가 나온다. 전쟁의 당사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현재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으며 어떤 출구를 모색 중인지 양국의 주한 대사를 잇따라 만나봤다. 양측의 엇갈리는 주장을 당사자 육성을 통해 그대로 전달한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 인터뷰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가 지난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대사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가 지난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대사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우크라이나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내는 것이지만, 영토는 종전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폭격을 멈추고 지난 2월 24일 침공 전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전까진 끝까지 싸우겠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한 지난 2월 24일 한국 외교부에 신임장을 제출하며 임기를 시작했다. 지난 26일 서울 용산구 대사관에서 만났을 때 그는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거듭 감사를 표하면서도 “대러시아 경제 제재가 느슨해져선 안 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2015년 돈바스 내전 종식을 위한 민스크 협정의 협상 과정에도 참여했던 일원으로서 그보다 훨씬 복잡한 이번 전쟁에서 손쉬운 출구가 없단 걸 직감하는 듯했다. 특히 러시아가 최근 전 세계적인 식량 위기를 틈타 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나선 데 대해선 “(세계를 상대로) 협박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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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종식 방법을 두고 서방 일각에서 ‘영토 양보’를 거론하기도 한다.
“최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다보스포럼 연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종전 관련해 협상할 의향을 드러냈다. 다만 우리의 영토를 놓고 거래를 하진 않을 것이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토에 대한 폭격을 멈추고 이번 침공이 있기 전 지역으로 철수하는 것이 최소한의 조건이다. 또 파괴된 우크라이나 국토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받아야 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일 줄 알았는데, 러시아군을 막아내는 원동력은.  
“현재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매우 힘든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초기에 승리를 장담했던 러시아를 키이우·하르키우 등에서 몰아냈다. 이제 그들은 작은 승리라도 말하기 위해 전투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정당성 없이 싸우는 러시아와 달리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는 분명한 목표를 가졌다. 게다가 우크라이나군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훈련을 받았고, 현대적인 전술로 대응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한 방식을 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 인근까지 왔을 때도 자리를 지킨 용기를 존경한다. 그는 정확한 계획을 통해 움직이고 있고, 방향에 대한 확신이 있다.”
이날 포노마렌코 대사는 "정당성 없이 싸우는 러시아와 달리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는 분명한 목표를 가졌고,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이날 포노마렌코 대사는 "정당성 없이 싸우는 러시아와 달리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는 분명한 목표를 가졌고,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와 핍박받는 돈바스의 해방 등을 러시아가 내세웠는데.
“그들이 하는 일이 오히려 나치 같지 않은가. 우크라이나엔 나치 추종 세력이 없다. 또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있는 소수 극단주의자의 존재가 그 나라를 침공해서 기반 시설을 파괴하고, 국민을 학살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돈바스 지역은 우크라이나 독립 후 20여년 간 잘 살아왔다. 2014년 크림반도 강제 합병 이후 러시아가 돈바스 반군 세력을 부추겼고 이 때문에 200만명 이상이 살던 곳을 떠났다. 2015년 민스크 협정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지역 내 선거 집행 등을 방해했고 침공에 앞서 도네츠크·루한스크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결국 모든 건 수년 동안 기획된 러시아의 영토 확장 야욕이었다고 본다.”(※민스크 협정은 돈바스 내전 종식을 위해 2014년과 2015년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체결된 2개의 협정을 말한다.)
러시아는 나토의 동진(東進)에 반발하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푸틴이 말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연관성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말이다. 오히려 우리는 중세부터 유럽과 교류하면서 유럽에 속한다는 느낌을 받아왔다. 우크라이나에는 고유의 역사·문화·언어가 있다. 러시아 국회의원들은 독립적인 우크라이나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말을 하는데, 그들은 카자흐스탄‧조지아‧몰도바 등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 2014년 이후 그들의 정체를 확실히 알았고, 부차와 브로댠카에서의 학살을 목도했다. 다시 교류하는 데 몇 십년이 걸릴지 몇 세기가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형제국가’라는 건 없다.”
지난 3월 2일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포노마렌코 대사와의 접견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지난 3월 2일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포노마렌코 대사와의 접견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전후에도 나토 가입을 추진할텐가.
“나토 가입은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서방, 그리고 러시아의 안보 보장이 있는 한 중립적인 상태도 유지할 수 있다. 다만 유럽연합(EU) 가입에 대해선 이미 결론을 내렸고, 많은 국민이 지지한다.”(※우크라이나는 지난 2월 러시아의 침공 직후 EU 가입 신청 의사를 밝혔다.)
최근 푸틴 대통령은 흑해 항구 봉쇄를 푸는 조건으로 서방의 경제 제재 해제를 거론했다.
“식량을 미끼로 한 러시아의 협박에 불과하다. 흑해 항구에서 나가는 곡물로 연간 4억명을 먹여 살리는데, 이걸 쥐고 흔드는 게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러시아의 민낯이다. 우크라이나의 농부들은 농기계를 돌릴 연료가 부족하고, 밭에는 지뢰들이 매설된 악조건에서도 식량 생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러시아의 봉쇄에 굴하지 않고 철로를 이용한 식량 운송을 계획 중이다.”
한국에 요청하고 싶은 사안은.
“이제까지 지원과 제재 동참에 감사드린다. 새 정부 출범 후 더 다양한 지원 논의가 나온다고 알고 있다. 곧 우크라이나의 재건 문제가 논의될 텐데 한국 정부뿐 아니라 기업들도 적극 참여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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