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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마천루 옆 슬래브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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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사람들의 회한에는 어딘지 심상치 않은 데가 있다. 실없는 말장난처럼 주고받지만, 돌아서서 곱씹어보면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돈으로 강남에 아파트나 한 채 사 둘 걸!''누가 아니래?'. 돌아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마도 그 어름이었지 싶다. 다른 사람들의 입가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번져나오고,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의미심장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성공담이 '개인'의 것에서 '개인들'의 것이 되면서 공공연해졌을 때 말이다. 그런 일들을 '일고의 값어치도 없다'고 일축하는 오불관언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도도한 탁류의 물결 속을 열심히 헤엄쳐가는 사람들에게는, 멀리 산기슭에 서 있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도무지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재빨리 한 마디를 던지며 그의 곁을 떠난다. '잘났어, 정말!'

서울 사대문 안의 유서 깊은 주택가인 우리 동네 여기저기에 자고나면 새 건물이, 새 무슨무슨 텔이, 새 이런저런 빌라가, 새 어쩌구저쩌구 다세대주택이 눈에 띄는 것도 이런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따지고 보면 우리 동네만의 일도 아니다.

서울시 전체가, 아니 국토 전체가, 각자 자신이 선 자리에서 저마다의 회한을 풀려는 생각에 온통 몸살을 앓는 중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밀착하여 살아가는 도시공간, 나아가 국토공간의 형태를 변화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어떤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유쾌함은 종종 여타의 사람들에게 생각보다 훨씬 깊고 지속적인 상처로 이어지는 모종의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온통 산을 가리고 들어선 아파트 때문에 오랜 세월 눈에 익어온 뒷산의 능선과 초록빛을 빼앗긴 사람들. 여러 층 올려지은 건물 뒤편에서 문득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격으로 주저앉은 단층의 집들. 새로 들어선 기괴한 모습의 건물 탓에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듯이 느껴지는 중심가 네거리의 풍경.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이와 가격으로 화제가 된 최고급 아파트에 견주어 자신의 보금자리가 초라한 숏다리처럼 느껴진 사람들에게 찾아온 막연한 상실감과 분노.

두서없이 들쭉날쭉 늘어선 동네의 새 건물들과 집들 사이를 머릿속이 뒤엉켜버린 듯한 어수선한 마음으로 지나다니던 나는, 불현듯 마구 어지럽혀진 어느날의 집안 풍경을 떠올렸다. 이런 것을 엔트로피(무질서도)의 증대라고 했던가. 컵은 깨지고, 사람은 늙고, 빅뱅에서 출발한 젊은 우주는 갈수록 팽창하면서 늙어가며, 만물은 음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수화기제(水火旣濟)괘에서 음양이 부조화스럽게 흩어진 화수미제(火水未濟)괘로 변해간다는 것.

그리하여 한번 조화와 균형이 깨진 동네의 풍경, 도시의 풍경, 국토의 풍경은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고, 부조화와 불균형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풍경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 역시 주변의 풍경을 닮아 조화롭지 못하고 균형잡히지 못한 불미(不美)스러운 것으로 변해간다는 것.

요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국운과 관련된 도참의 담론들이 성행한다. 그것들은 대체로 낡은 세계의 파국적인 패망에 뒤이은 새로운 세계의 희망적인 도래라는 줄거리를 지녔다. 그에 관한 구체적인 판단은 필자의 좁은 시야를 넘어서는 일이거니와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조화와 균형이 깨짐으로써 엔트로피가 급속도로 증대하는 까닭에 우리의 집단적 정체성이 불길한 쪽으로 간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언젠가는 이것을 본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하리라는 문제의식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문제와 집단의 문제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결에 사람들의 관심이 강남의 아파트값 문제로 되돌아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강영희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