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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 서있죠" 까만점퍼男이 물었다…생소한 대통령 출근길 [르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경호차량이 대기 중이다. 주민들은 신경쓰지 않고 길을 건넜다. 채혜선 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경호차량이 대기 중이다. 주민들은 신경쓰지 않고 길을 건넜다. 채혜선 기자

“서초경찰서 경비계입니다. 이곳에 왜 계속 서 계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난 26일 오전 10시쯤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건너편 횡단보도 앞. 검은색 점퍼를 입고 귀에는 경호용 무전기 이어 마이크를 차고 있던 한 경찰관이 기자에게 다가와 물었다. “언론사에서 취재 나왔다”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선인님이 곧 나오십니다. ‘취약지점’으로 파악돼 서 계신 연유를 확인했습니다.”

어색 또는 익숙…대통령 당선인의 출근길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집무실로 향하며 취재진 질문에 미소를 보이고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집무실로 향하며 취재진 질문에 미소를 보이고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서 매일 이런 이색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사는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의 인근의 아침 풍경이다. 그곳은 현재 특별 경호구역으로 설정돼 있다. 대통령 경호실과 경찰 등이 24시간 경호 경비를 한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 한 달 넘게 이어지게 된다. 윤 당선인이 다음 달 10일 취임 뒤에도 한 달여 동안 자택에서 출퇴근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의 새 관저 리모델링을 기다려야 한다. 자택과 집무실을 오가는 현직 대통령의 전례 없는 출퇴근길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26일 오전 9시 50분쯤 아크로비스타 정문 주변에 경찰 오토바이 5대와 순찰차 2대가 나타났다. 윤 당선인의 출근을 알리는 ‘시그널’이다. 동시에 아크로비스타 정문 출입구 근처에는 정장을 입은 남성 7명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아크로비스타 앞 횡단보도나 맞은편 서울법원종합청사 인근에는 근무복 혹은 사복을 입은 경찰 10여 명이 순식간에 배치됐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10분쯤 뒤 경찰특공대 폭발물탐지견 1마리가 아크로비스타 정문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경찰은 배달 오토바이 등에 상황을 안내하는 등 주변을 통제했다. 곳곳에서 무전기 소음이 들렸다. 우연히 길을 지나던 40대 주부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와서 그리 신기한 광경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무심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나타난 20명 경호 인력에 깜짝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탄 경호차량이 자택을 빠져나오고 있다. 채혜선 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탄 경호차량이 자택을 빠져나오고 있다. 채혜선 기자

대통령의 출근길을 지켜보다가 ‘취약지점’이라는 경호용어도 알게 됐다. 대통령 출근 때 주변에 잠시라도 머무는 시민은 ‘취약지점’으로 관리된다고 한다. 윤 당선인 출근 모습을 보기 위해 서울법원종합청사 앞에 서 있던 기자가 경찰로부터 취약지점이라는 안내를 받은 이유다. 경호하는 입장에선 혹시 모를 ‘위험 요소’로 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다만 경찰은 윤 당선인 출근 때 우연히 길을 지나가는 시민의 통행은 막지 않는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촬영도 금지하지 않는다”며 “시민 불편 최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서울 도심의 일상에 갑자기 등장한 대통령의 이색적인 출근길은 일부 시민에겐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날도 오토바이, 무전기, 번쩍이는 사이렌(무음)에 눈살을 찌푸리는 행인을 볼 수 있었다.

윤 당선인이 자택에서 걸어 나와 경호 차량에 타는 순간에는 아크로비스타 쪽 인도에 있는 ‘관람객’들은 경찰의 안내를 받아 길 건너 서울법원종합청사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윤 당선인은 이날 오전 10시 30분쯤 자택에서 나와 경호 차량 3대 가운데 한 차량에 탑승했다. 경호 인력 20여명이 아크로비스타에 등장한 지 약 40분 만에 출근길이 마무리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탄 경호차량이 자택을 빠져나오고 있다. 채혜선 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탄 경호차량이 자택을 빠져나오고 있다. 채혜선 기자

“촬영하는 사람 많이 줄어”

이날 현장의 ‘취약지점’은 기자를 포함해 3명이었다. 윤 당선인의 모습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는 시민은 이날은 보이지 않았다. 이 동네 환경미화원 A씨는 “당선 초창기 때보다는 많이 줄었다. 이젠 출근길을 촬영하는 시민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윤 당선인이 탄 차량은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로의 모든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어 차량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출퇴근이 시민 교통 불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검토해왔으며 현장 시뮬레이션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감시 불편” vs “자랑스러운 이웃”

윤 당선인 차량이 자택을 빠져나갈 때 길을 걷던 60대 여성은 “출근길을 종종 보는데 이젠 일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크로비스타에 10년 넘게 살았다는 한 80대 여성은 “사복 경찰 등이 너무 많아서 감시받는 느낌이 불편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한 달만 참아야지…”라고 말했다.

당선이 확정된 날 새벽에 축하 현장에 있었다는 아크로비스타 주민 박모(72)씨는 “그때처럼 와글와글한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 창 너머로 당선인이 출퇴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친근하게 느껴진다”며 “그냥 동네의 자랑스러운 이웃 같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국민에겐 여전히 생소한 대통령의 출근길.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끊겠다”는 당선인의 공약과 맞물리면서 앞으로도 이목이 쏠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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