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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교시로 미술활동 「만수대 창작사」(북녘의 문화ㆍ예술: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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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작가 천여명… 문신부ㆍ임양 흉상도/월북 미술인 일부 아직 활동 확인
「조선화에 근본을 둔 사회주의적 사실화」. 지난 17일 북한미술의 총본산이랄 수 있는 평양의 만수대 창작사를 찾았을 때 이처흡 총사장(56)은 해방이래 일관된 북한미술의 창작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7만평방m의 대지에 연건평 4만평방m의 건물. 조선화ㆍ조각ㆍ유화ㆍ벽화ㆍ출판화ㆍ장식도안ㆍ공예ㆍ수예ㆍ도자기ㆍ수인화(화조화) 창작단 등이 직능별로 들어서 있는 만수대 창작사에는 곳곳에 창작원칙과 방향에 대한 김일성ㆍ김정일의 교시가 돌이나 액자에 씌어있었다. 안내원들의 설명 역시 이 「교시」를 해설하는 수준이었다.
그중에서도 북한 미술의 현주소를 이루게한 가장 중요한 「교시」로 여겨지는 것은 『만수대 창작사의 모든 창작가들과 종업원들은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백방으로 보장하며 수령님의 영광 찬란한 혁명업적을 만대에 길이 빛내이는 더없이 숭고한 사업에 이바지한다는 커다란 긍지와 영예감을 가지고 수령님의 동상과 대기념비적 작품을 창작하는데 자기의 정력과 재능을 다 바쳐야 하겠습니다.­김정일』이란 글이다.
남한의 화가들이 주로 각자의 화실에서 창작활동을 한다면 북한화가들은 만수대 창작사와 같은 조직속에서 미술활동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평양에 만수대 창작사가 있듯이 각 시ㆍ도에도 나름의 창작사가 있고 창작에서 전시ㆍ판매까지도 이런 기구를 통해 철저히 조직적으로 이뤄진다.
만수대 창작사가 세워진 것은 59년 11월17일로 『조각창작단이 천리마 동상을 제작,위대한 수령님께서 테이프를 끊으신 날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는 것이 이총사장의 설명이다.
만수대 창작사에는 총사장 아래 5명의 부총사장이 있는데 제1부총사장은 전반적 업무를 맡고 또 창작ㆍ제작ㆍ작품 보존 보급ㆍ판매 부총사장을 두어 창작활동을 하는 1천명의 미술가와 이들을 뒷바라지하는 1천명의 종사원을 통괄토록 하는 것이 이 창작사의 기본조직.
9개 분야의 미술가들은 대작을 만들 경우 20∼30명 정도가 한 그룹이 되어 집단창작을 하는데 지난해 방북했던 임수경양의 기록화가 바로 좋은 예다. 높이 2.5m,가로가 최소 4m에서 최대 40m에 이르는 이 대형 기록화들은 별도의 제작실 사방 벽면을 꽉 채우고 있다.
이 그림들은 ▲백두산에서의 출정 ▲평양의 대환호 ▲판문점에서의 절규 ▲통일의 꽃 림수경을 맞이하자! 등 4편으로 돼 있는데 그중 「통일의 꽃­」부분 오른편 아래쪽에는 임양의 「수표」(서명)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 기록화의 집단창작에 직접 참가했다는 조선화창작단 대표 최계근씨는 『남조선 TV장면을 토대로 임양의 고증을 거쳐 남조선 학생들의 투쟁을 그린 것』이라고 밝혔다.
34명의 조선화가들이 동원돼 1개월간 작업했으며 임양의 방북 1주년기념에 맞춰 지난 8월15일에 완성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모든 분야의 미술작품들이 사진이나 실물과 거의 똑같이 사실적이어서 추상적 작품은 없느냐고 묻자 『인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은 필요없기 때문에 미술가들이 노동자ㆍ농민들의 작업현장에 나가 사실과 부합되는 작품들만 창작한다』고 대답했다.
만수대 창작사 소속 미술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기량전시실」과 전시판매장에는 임수경양ㆍ문익환 목사ㆍ문규현 신부의 흉상ㆍ테라코타ㆍ보석화ㆍ수예품 등이 상당수 눈에 띄었고 이념성이 두드러진 경우가 많았다. 도자기 작품도 흔한 데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은 도예가 이현순씨는 『황해도ㆍ함경도에서 좋은 점토가 나와 우수한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또 지난 18일 범민족 통일음악회 개막식에서 한라산 백록담 물과 백두산 천지물을 섞는 합수제 때 쓴 고려분청 물컵도 이 창작사의 우치선ㆍ이사춘씨 작품.
옥돌ㆍ홍옥 등 북한 각지에서 나는 갖가지 빛깔의 보석을 가루내어 입체감이 살아 있는 사슴ㆍ호랑이ㆍ인물 등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한 「보석화」도 신봉화씨가 발명했다는 독특한 분야.
또 이총사장에 따르면 평양의 대표적 조각품들은 모두 만수대 창작사 소속 작가들의 집단 창작품이며 김일성 배지도 이곳 화가들이 20여종이나 도안해 「각자 모시고 싶은대로」 고를 수 있게 했다는 자랑이다.
이 창작사의 전시장에 전시된 그림들은 놀랍도록 값이 비쌌다. 창작 부총사장이자 인민예술가이며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인 정영만씨(52)의 대형 수묵화 「금강산 만물상」의 경우 북한 화폐로 10만원(약5만달러),월북화가 이석호씨의 작품(8호크기)에는 5만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한편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던 상당수의 월북미술인들에 관한 상황도 알게됐다.
만수대 창작사에서 만난 미술인들에 따르면 판화가 배운성씨가 평양미술대 교수를 지내다 70년대에 사망했으며 서예가 김주경씨는 동의학 박사가 됐는데 약8년전쯤 사망했다는 것. 서양화가 길진섭씨는 미술가동맹 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냈으며 10년전쯤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에서 「출판화가」로 알려진 정현웅씨는 미술가동맹 출판화부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주로 역사에 관한 삽화를 펜화로 제작해 이름을 날렸는데 지난 70년대 중반 사망했다.
그밖에 원로 여류화가 정온녀씨는 현재 자강도 창작실에서 활동중이며 공훈예술가가된 임군홍씨는 영화촬영소 의상 및 무대미술의 권위자로 활동중.
한편 이 창작사에서 만난 미술가들은 한결같이 『남북 미술교류를 적극 환영한다』는 의견이었는데 『이미 재미교포를 통해 서울에서 두차례나 북한 미술전시를 가졌는데도 남측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어 별반 교류의사가 없는게 아닌가 했다』고 말했다.
미술가동맹 정위원장은 『우리는 언제라도 교류전시를 가질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평양=김경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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