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쓰봉’과 ‘우와기’ 기억하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우연한 기회에 차로 두어 시간을 가야 하는 곳에서 낯선, 그러나 곧 친근감을 갖게 되는 어떤 이를 만났다. 잠시 들렸던 휴게소에서 사 온 맥반석 오징어를 질근질근 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난데없이 ‘우와기’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한참을 어리둥절하던 그때 콩트 같은 일화가 소개됐다. 오래전 이 낯선 이가 선배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별생각 없이 찢어놓은 오징어 몸통을 집어 드는 순간 “어디서 우와기를 먹어?”라는 질책의 소리가 들렸단다. 까마득한 여자 후배가 다리도 아니고 살이 오동통한 오징어 몸통을 집어 들다니. 게다가 주변 사람들은 이 오징어 몸통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와기라고 불렀단다.

일본어 잔재가 사라진 자리에
국적·정체성 모를 혼종어 활개
우리의 ‘얼’은 어디에서 찾을까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면서 우리 부모 세대에는 일본어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나도 어린 시절 엄마 심부름을 다닐 때면 몇몇 일본어를 곧잘 우리말인양 알아듣곤 했었다. 그 시절이 지나며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일상에서 일본어가 하나둘 사라지고, 오봉·벤또 같은 어휘들이 쟁반·도시락이라는 우리말로 돌아왔다. 물론 우와기는 윗도리, 쓰봉은 바지로. 이렇게 우리 삶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일본어의 잔재나 어쭙잖은 일본식 영어 발음의 쓰봉·도란스·바께쓰 같은 괴상한 단어를 생각하다, 상처에 바르던 옥도정기가 아까징끼였다가 ‘빨간약’으로 불리던 대목에서는 슬그머니 웃음이 배어난다.

1980~90년대를 아우르면서 왜색 흔적을 지우고, 우리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학가에서는 ‘국풍’에 이어 ‘신토불이’의 신바람과 함께 우리 전통의 풍물패 장단이 큰 물결을 이루었다. ‘우리 것’ 혹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선언문과 함께 우리 문화의 숨결을 담은 활동이 학교 안팎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교내 어디서나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들리고, 널찍한 공간만 있으면 상고를 쓰고 북과 징을 두드리는 동아리 구성원들의 춤사위가 판을 이루었다.

이렇게 한바탕 휘몰아치던 바람이 잠시 잠잠해지는가 싶었는데, 최근에는 한류의 이름으로 K팝을 비롯한 다양한 K문화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런 열풍은 80~90년대를 이어 다시금 ‘우리 것’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지구 곳곳을 들썩이게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말이 또다시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영어 같기도 하고, 일본어 같기도 하고, 낯선 외국어 같기도 하고, 또 우리말 같기도 하고. 영 종잡을 수 없는 혼종 표현들이 넘쳐난다. ‘멘붕’처럼 절반은 영어에 절반을 한자어로 섞어 놓은 것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할 초두음만으로 된 연속체도 등장했다. ‘자(동)판(매)기’나 ‘야(간)자(율학습)’처럼 음절 단위의 줄임만은 있어도 초두음만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말 어법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온라인 메신저의 등장과 더불어 ‘ㅅㄹㅎ(사랑해)’ 같은 표현을 지나, ‘ㅇㅋ(OK)’ 혹은 ‘ㄹㅇ(real)’처럼 영어의 한국어 표기를 따온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 난무한다. 이제는 너무나 흔한 상투어가 되어버린 ‘ㅎㅎ’ ‘ㅋㅋㅋ’ 등은 대화 상대를 잘 가려서 써야 한다는 주의도 듣는다. 상대방에 따라서는 비아냥으로 들릴 수도 있다기에.

언어도 유행을 타듯 사라지는 것도 있고, 또 새로운 표현이 생겨나 우리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렇게 우리말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또 하나의 현상은 말장난 같은 사자성어가 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나 ‘폼생폼사(form生form死)’ 같은 국적 모를 네 글자 조합이 창의적 기발함을 업고 천연덕스럽게 활개를 친다. ‘고진감래(苦盡甘來)’ 대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나 ‘감탄고토(甘呑苦吐)’를 몰라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익숙한데, 요사이 유행에 빗대면 ‘고끝낙온’이나 ‘달삼쓰뱉’이 시대에 어울리는 사자성어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국적도 정체성도 가늠되지 않는 마구잡이 조합이다. 이렇게 뒤엉킨 창조적 발상은 말에 깃들인 생각의 틀마저 뒤틀어 놓는다.

더 이상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는 디지털 문명 안에서, 수천 년을 거스르는 동서양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인문학으로 소환되어 가르침의 소재가 된다. 반면 로봇과 인공지능에 지배되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온통 영어로 채색된 것 같은 낯선 단어들을 체화해야 한다. 고전과 미래를 오가는 사이 말이 곧 ‘얼’이라는데, 흔들리는 우리의 정신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살아야 할까.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