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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성별 갈라치기, 승자는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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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선 전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서울 홍대 앞 유세 장면.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영입한 '추적단 불꽃' 활동가 박지현(26)씨와 함께 했다. 박씨의 영입은 선거 막판 이대녀의 결집에 큰 역할을 했다.[연합뉴스]

대선 전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서울 홍대 앞 유세 장면.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영입한 '추적단 불꽃' 활동가 박지현(26)씨와 함께 했다. 박씨의 영입은 선거 막판 이대녀의 결집에 큰 역할을 했다.[연합뉴스]

정확히 대선 D-2일이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CBS 라디오에 출연해 “여성의 투표 의향이 남성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여성들의 이재명 후보 지지 관련) 조직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 온라인에서는 보일 수 있겠으나 실제 투표 성향으로 나타나기는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힘을 열심히 미는 이대남(20대 남성)과 달리 이대녀(20대 여성)의 표는 결집하지 않는다는 요지였다. 진보 성향 이대녀의 표심은 페미니스트 후보인 심상정 정의당 후보에게 가 있다는 분석이었지만, 대선을 코앞에 둔 당 대표가 특정 유권자를 ‘뭉치지 않는, 표 안 되는’ 집단쯤으로 재단하는 오만함이 충격적이었다. 안 그래도 성별 갈라치기 전략의 원조가 이 대표 아닌가.
D-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직전에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영입한 박지현(26)씨와 대학가 유세에 나섰다. 박씨는 ’n번방‘ 사건을 추적 보도ㆍ여론화한 ’불꽃‘의 활동가다. 상당 기간 이대남과 이대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민주당이 읍소한 결과였다. 그간 딥페이크(불법 영상 합성) 협박 속에 얼굴을 비공개해 왔던 박씨가 얼굴을 드러내고 이 후보의 손을 들어 올렸다. 이미 이대녀들 사이에는 ’이재명 대 윤석열‘이 아니라 ’박지현 대 이준석‘이라는 구도가 자리 잡은 상황. SNS에는 1번도 싫지만 2번만은 막아야겠다는 ’눈물의 회심‘ 선언이 속속 올라왔다. 이날은 하필 세계 여성의 날이었는데, 국민의힘은 여가부 폐지와 성범죄 무고죄 처벌 강화를 공약으로 거듭 밝혔다.
D+1. 윤석열 당선인은 0.73%포인트 차이로 신승했고, 심상정 후보에게는 하룻밤 사이 12억원의 후원금이 들어왔다. 이대녀의 표 결집력을 보여주기 위해 막판에 민주당으로 갈아탔던 이들까지 십시일반 주머니를 턴 결과였다. 지상파 3사 출구조사 결과 20대 표심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이대남은 윤 당선인(58.7%)을, 이대녀는 이 후보(58.0%)를 더 많이 지지했다. 20대 이하 전체 지지율에서는 이 후보(47.8%)가 윤 당선인(45.5%)을 앞섰다. 막판 이대녀의 결집이 국힘의 발목을 잡았다는 얘기다. 이대녀들 SNS에는 1번을 찍은 1번남과 2번남을 비교하며 2번남을 비하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갈라치기가 또 다른 갈라치기로 이어졌다.
원사이드로 승패가 갈리지 않아 양당 모두에 경종을 울린 이번 대선의 교훈이라면 젠더 갈라치기 전략 역시 절반의 승리를 안길 뿐 만능 키가 될 수 없음을 확인시킨 점 아닐까. 이대남만 바라보면 그만큼 이대녀를 잃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표가 보여줬다. 젠더 갈등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면 그만큼 정치적 부메랑이 돌아온다는 점도 확인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선거 기간을 통과하며 부풀려진 젠더 갈등의 골을 새 정부를 비롯해 정치권이 여하히 풀어나갈 것이냐는 과제가 놓였다. 우선 윤 당선인은 “역사적 소명을 다 했다”며 핵심 공약인 여가부 폐지를 거듭 확인했다. 능력주의 원칙에 따라 인수위원회 구성에서부터 여성할당제, 영호남 지역 안배를 하지 않기로 했다. 민주당은 박지현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을 당 비상대책위 공동위원장에 전격 인선했다.
이 중 향후 국회 통과 등을 거치며 뜨거운 논란이 예상되는 여가부 폐지 문제는, 정책 대안과 새로운 젠더 정책 방향에 대한 설득력 있는 제시가 대전제다. 제 역할 못 하는 여가부의 리셋 필요성에 대해서는 여성계 내부에도 공감이 많았으나 이게 정치 슬로건이 되면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성 평등을 앞당기고 소모적인 갈등을 줄이며 제대로 된 젠더 정책을 펴기 위한 리셋과 ’페미니즘 박멸‘류의 리셋은 다르다. 젠더 갈등이 사회의 앞날에 암운을 드리울 정도로 심각한데 인수위원회에 젠더 이슈 분과가 따로 없는 점도 유감이다. 여성뿐 아니라 젠더라는 말을 내세우는 것 자체를 꺼리고, 어떻게 바꿔가겠다보다 우선 폐지부터 하고 보겠다는 건 이대남ㆍ이대녀 모두를 껴안아야 하는 당선인의 자세가 아닌 듯하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젠더 정치공학 부메랑 확인한 대선 #이대남, 이대녀 모두 껴안기 부터 #젠더갈등 해소 최우선 과제 삼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