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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갈라파고스 외교 벗어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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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북핵 쿼드에 맡기고 뒷짐질 때인가
5월 '쿼드+한국' 회담 적극 나서야
취임식 '아베 특사' 성사될 지 주목

윤석열 당선인에 대한 일본의 기대감은 상당하다. 최악으로 무너져내린 한·일 관계에 대한 반작용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며 애써 기대치를 낮춰 보려 해도, 만나는 일본인들은 "에이, 그래도~"를 연발한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다. 이제부터 재건축 시작인데 말이다. 향후 5년 한·일 관계의 가늠자가 될 수도 있는 '취임 직후 포인트'는 두 가지.

#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당일 오후 3시 청와대. 일 정부 특사로 방한한 아소 부총리는 돌연 미국의 남북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북부에선 여전히 '시민전쟁'이라 하고, 남부에선 '북부의 침략'이라 한다. 같은 국가, 같은 민족이라도 역사인식이 다른 법이다."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아소는 멈추질 않았다. "그러니 다른 나라 사이는 오죽하겠는가. 일·한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전과 침략을 동일시한 궤변이었다. 박 대통령이 나흘 뒤 내놓은 3·1절 기념사 강도는 역대급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란 역사적 입장은 천 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 그렇게 양국은 앙숙의 세월을 보냈다. 첫 단추가 잘못 꼬인 결과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에 참석한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를 접견하고 있다. 아소 부총리의 '남북전쟁' 언급에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참모진은 격노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에 참석한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를 접견하고 있다. 아소 부총리의 '남북전쟁' 언급에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참모진은 격노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

오는 5월 10일 취임식 특사 선정은 오롯이 일본의 몫이다. 가장 좋은 건 기시다 총리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 거론되는 '아베 특사'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베는 우익 정치인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그만큼 세련된 언어, 상황 판단을 할 줄 아는 이도 일 정치권에 드물다. 차별주의자 아소와는 결도 격도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향력이 큰 아베가 한국을 다녀가면 향후 기시다가 한국과의 외교에 일본 내 보수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진다. 전략적 선택이 될 수 있다.

# 정상회담 시기와 방법도 포인트다. 현재 한·일 간에는 강제징용·수출규제·사도 유네스코 등재 등 민감한 현안이 한둘이 아니다. 다짜고짜 협상을 시작하면 심각한 마찰음이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따라서 먼저 지역패권을 노리는 중국에 대한 생각,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인식, 인권과 민주주의 등 두 정상이 '공동의 가치'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 점에서 5월 말 도쿄에서 열릴 예정인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 협의체) 정상회담이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이 '쿼드+1' 형태로 참석하는 걸 적극 추진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한·미·일 3국 정상회담, 한·일, 한·미 정상회담 모두 가능하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 방향을 대내외에 한꺼번에 선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별도 단독회담의 부담을 덜고, 7월 참의원 선거 전까지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는 기시다의 입장도 배려할 수 있다. 미국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핵실험이란 메가톤급 도발이 현실화됐다. 그런데 당사국 한국만 뒷짐 진 채 미·일·호주·인도로 하여금 북핵 문제를 논의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한국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다"란 국제사회의 비아냥은 문재인 시대 5년으로 족하다.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3월 스가 요시히데 당시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함께 영상으로 쿼드 첫 정상회의를 열었다. 오는 5월말 일본 도쿄에서 처음으로 대면으로 진행되는 쿼드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3월 스가 요시히데 당시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함께 영상으로 쿼드 첫 정상회의를 열었다. 오는 5월말 일본 도쿄에서 처음으로 대면으로 진행되는 쿼드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AFP=연합뉴스]

# 6·25 때 말로만 전해 듣던, 영상으로만 봤던 전쟁 피난민들의 모습을 2022년 3월에, 동유럽의 우크라이나 국경선 앞에서 직접 지켜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후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안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동맹인 미국이나 가치를 함께 하는 우호국 일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우린 지난 5년간 너무 잊고 살았다. 속이 뻔한 중국과 북한 눈치 보며 마이웨이를 외치다 갈라파고스에 갇혔다. 고종이 러·일 전쟁 당시 조선을 영세중립국이라 선언했다 철저히 무시당한 것과 다름없다. 그런 점에서 윤 당선인은 행운아다. 비록 '성공의 공식'은 못 받았지만, '확실하게 실패할 공식'을 그대로 전수받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