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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가에 원화 가치 추락 겹쳐, 스태그플레이션 진입 단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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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9호 14면

한국 경제 덮친 더블 쇼크 

11일 서울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평균 2000원을 넘어섰다. [연합뉴스]

11일 서울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평균 2000원을 넘어섰다. [연합뉴스]

1970년대 중동전쟁 등에서 비롯된 ‘오일 쇼크’ 공포가 되살아나고 있다. 6일(현지시간) 국제 유가는 장중 배럴당 130달러대(브렌트유 기준)로 금융위기가 터진 해인 2008년 이후 1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후 한 풀 꺾여 현재 110달러선이지만 재상승은 시간문제란 전망이 우세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다. 영국의 투자은행 바클레이스는 “러시아산 원유 공급이 대부분 막히면서 유가가 200달러를 넘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한국도 11일 서울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평균 2000원을 넘어서면서 8년 6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은 이런 유가 급등과 함께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둔화 속 물가 상승)을 유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충격에 유의할 때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환율 얘기다. 11일 원·달러 환율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본격화되던 2020년 이후 1년 9개월 만의 1230원대 종가를 이어갔다. 과거 각종 위기 때마다 방어선이 됐던 1250원 고지에 근접한 것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한국은 제조업의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아 고유가에 원화 약세가 심화될 수밖에 없다”며 “외환시장 규모가 선진국보다 작은 것도 환율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한 주 원화의 약세 폭은 중국 위안화의 10배 수준이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유가·환율 동반 급등에 따른 ‘더블 쇼크’를 우려할 만큼 지금 상황을 심상찮게 보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러시아가 사실상 디폴트(국가부도) 상태에 처하면서 신흥국 전반의 경제 상황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한 것이 달러화 강세 압력을 키우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정환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이달 중 환율이 1250원선에 도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 투자자들 자금이 국내에서 많이 빠져나가는 현상도 나타날 것”으로 우려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원화 약세가 두드러지는 경우 한국경제가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은 만만찮다. 우선 모든 수입산 원재료 값이 비싸지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제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들은 수익성 악화의 위기에 처한다. 그러면 제품 값이 뛸 수밖에 없다. 이는 자연스레 가계 부담으로 이어진다. 소비는 그만큼 위축되고 기업들의 고용·생산·투자도 둔화된다. 이는 곧 스태그플레이션 상태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지금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국가적인 경제위기 상황의 초입을 맞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이사는 “지난 20년간 한국의 무역수지는 2008년 유일하게 연간 적자였는데 최근 유가 흐름이 그때와 비슷하고 무역수지도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무역수지는 지난해 12월 -4억2600만 달러, 올 1월 -47억3000만 달러로 2008년 이후 처음으로 두 달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2008년 금융위기 직전 한국은 유가·환율의 더블 쇼크 국면에 접어든 바 있다. 그해 1월 90달러대였던 유가가 7월 140달러대까지 급등하자 900원대였던 환율도 급등세를 보였다. 금융위기까지 터져 그해 11월엔 1400원대를 기록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아직 임기가 남은 문재인 정부, 5월 출범할 윤석열 정부가 당시 일을 교훈 삼아 적절한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분석도 제기하고 있다. 공교롭게 그해 역시 새 정부(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 고환율 정책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시 원화가치가 고평가됐다고 보고 의도적으로 원화 약세를 유지하려 했다. 적정 수준의 원화 약세엔 순기능이 적잖다. 해외에서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좋아져 기업들이 실적 개선에 탄력을 받을 수 있고, 국가적으로도 경상수지 개선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당시 정부가 노린 것도 이런 순기능의 극대화였다. 하지만 고환율 정책은 피할 수 없는 대외 변수인 유가 급등 등으로 가뜩이나 변동성 커진 당시 외환시장에 불안정성을 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환율이 너무 올라 물가가 급등하자 내수시장에선 소비 침체로 심상찮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금융위기 국면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치솟는 환율을 끌어 내리도록 정책 방향을 틀어야했다. 익명을 원한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정부가 정책을 짤 때 거시경제의 기본 원리뿐 아니라 대외 상황·변수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 사례”라고 해석했다. 이처럼 초기 환율 정책에선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비교적 빠르고 원만하게 금융위기를 극복한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2008년 10월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체결에 성공한 이후 환율이 조금씩 안정되고, 외국인 자금 이탈도 잦아들면서 당초 우려처럼 1997년 외환위기 수준의 심각한 국가적 경제위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례까지 고려해 다각도로 더블 쇼크의 해법을 미리 모색할 때라고 강조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미 통화스와프 종료와 단기 외채 비율 급등 등으로 금융시장 리스크가 커진 상황”이라며 “한·미 통화스와프를 조속히 재개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28%에 불과한 외환보유고를 두 배로 늘려 환율 급등과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희찬 이사는 “원화 약세가 수출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건 경쟁국 통화 가치도 하락 중인 현 상황엔 안 맞는 얘기”라며 “특히 원재료 수입이 많은 기업 외에 달러 표시 부채가 많은 기업도 타격이 크기 때문에 이들 맞춤형 지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또 기업들이 공급망을 빠르게 다변화해 유가와 원자재 가격 급등에 대응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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