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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중거리 중단’도 약속했었다…정부, 알면서 '모라토리엄 파기' 규정 안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한이 지난달 30일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밝혔다.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달 30일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밝혔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직접 ‘모라토리엄’(유예)을 약속한 도발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와 핵실험 뿐 아니라 중거리 미사일도 포함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를 인지하면서도 지난달 30일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발사를 모라토리엄 파기 ‘근처’로만 규정했다.

북한이 모라토리엄 의사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지난 2018년 4월 20일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였다. 당시 김 위원장은 보고에서 “핵무기 병기화 완결이 검증된 조건에서 이제는 우리에게 그 어떤 핵시험과 중장거리, 대륙간탄도로켓 시험발사도 필요없게 됐으며 이에 따라 북부 핵시험장도 자기의 사명을 끝마쳤다”고 밝혔다.

장거리 미사일 및 ICBM 시험발사와 핵실험뿐 아니라 중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도 더 이상 필요 없으니 그만하겠다고 김 위원장이 육성으로 선언한 것이다.

지난 2018년 4월 전원회의를 주재 중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지난 2018년 4월 전원회의를 주재 중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김 위원장이 주재한 지난달 19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국 회의에서 북한은 “우리가 선결적으로, 주동적으로 취했던 신뢰 구축 조치들을 전면 재고하고, 잠정중지했던 모든 활동들을 재가동하는 문제”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4년 전 직접 밝힌 대로라면 ‘잠정중지했던 모든 활동’은 중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도 포함하는 것이고, 공언한 대로 이를 재가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북한의 중거리 미사일 발사는 2018년 4월 이후 처음이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북한의 중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직후인 지난 1일 성명을 내고 “이는 2018년 북한이 선언한 모라토리엄을 깬 것”이라고 규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 북한이 중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감행한 직후 정부 일각에서도 이를 모라토리엄 파기로 봐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시험발사 직후 직접 청와대 국가안보회의(NSC) 전체회의를 주재하며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라면 모라토리엄 선언을 파기하는 근처까지 다가간 것”이라고 표현했다. ‘근처’까지 갔지만, 파기는 아닌 것으로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정부가 2018년 4월 북한 전원회의 당시 김 위원장이 직접 한 육성 약속보다 회의 결과물로 채택된 결정서 상 표현을 더 주목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오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북한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긴급 전체회의를 주재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오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북한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긴급 전체회의를 주재했다. 뉴스1

당시 회의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의 ‘승리’를 선언하며 채택한 결정서는 이와 관련해 “2018년 4월 21일부터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를 중지할 것”이라고 표현했다. 김 위원장이 직접 언급한 중거리 미사일은 빠졌다.

정부 당국자는 “김 위원장의 발언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북한이 모라토리엄을 파기했다고 보는 논리도 있을 수 있지만, 정부는 결정서 명시 사항을 기준으로 모라토리엄을 이해해왔다. 당시 북한이 회의 결과물인 결정서에서 스스로 부과한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렇다고 중거리 미사일 시험발사가 엄중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도 지난달 30일 NSC 전체회의에서 “북한이 그동안 대화 의지를 표명하면서 핵실험, ICBM 발사 유예 선언을 지켜왔는데…”라고 표현, 결정서를 기준으로 언급했다.

지난 2018년 4월 열린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뉴스1

지난 2018년 4월 열린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뉴스1

하지만 이는 정부가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기준선을 되레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낮춰주는 것처럼 인식될 소지가 다분하다. 북한이 넘어서는 안 될 ‘레드 라인’(임계선)을 중거리 미사일 도발은 제외한 채 더 뒤쪽에 그어주는 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의 특성을 고려할 때 김 위원장의 직접 발언보다 결정서를 우선시하는 듯한 정부의 기준이 의아하다는 반응도 있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에서는 최고지도자 발언-노동당 강령-각 기관의 결정 순으로 권위를 지니는데, 정부의 판단 기준은 이와 다르다는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실제 결정서 상의 표현을 액면 그대로 기준으로 삼는다면 북한이 장거리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해 ‘위성’을 발사해도 이는 모라토리엄 파기가 아닌 게 될 수 있다. 결정서에는 ‘ICBM 시험발사’만 중지한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 위원장이 중거리 미사일에 대해서도 모라토리엄 의사를 밝힌 건 당시가 처음도 아니었다. 2018년 3월 대북 특사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한 뒤 돌아온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김 위원장을 직접 면담한 결과라며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북 측은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전략도발을 재개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명백히 했다”고 밝혔다. 사거리와 관계없이 아예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자체를 유예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에서는 수령의 발언과 발표상 표현에 불일치가 있더라도 문제가 없지만, 이를 해석해 정책에 반영해야 하는 우리 정부는 다르다”며 “특히 안보와 관련한 문제인 만큼 북측에 간단한 성명을 보내는 방식으로라도 진의를 명확히 파악해야 했는데, 정부가 이런 대응에 미흡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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