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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들의 ‘관객모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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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허진 기자 중앙일보 기자
허진 정치팀 기자

허진 정치팀 기자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페터 한트케가 1966년 발표한 희곡 ‘관객모독’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정해진 스토리가 없고 배우가 관객을 모독한다. 관객은 욕설을 듣고, 막판에는 물벼락까지 맞는다. 희한한 연극이다.

더 희한한 건 지금 한국 대선의 광경을 ‘관객모독’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선 배우 면면이 그럴듯하다. 한 명은 대사를 칠 때마다 말이 바뀐다. “존경하는 관객 여러분”이라고 말하곤 곧바로 “내가 진짜로 느그들 존경하는 줄 알았냐”고 씩 웃는다. 욕을 하는데 연기 같지 않아서 놀랍다. 또 한 명은 “관객 여러분이 불러서 부득이하게 나왔다”며 화를 낸다. 분명 초보 배우인데 다른 배우들에게 “연기가 같잖다”고 호통친다. 다른 한 명은 틈날 때마다 “무대에서 그만 내려가라”며 동료를 공격한다. 그런데 이 배우 최다 출연자다. 극단 후배들이 자리 좀 비켜달라고 해도 꿋꿋이 무대에 오른다. 마지막 배우는 무슨 공연이든 열린다고만 하면 달려온다. 그런데 연기력이 좀체 늘지 않는다. 카리스마 있는 배역에 욕심을 내지만 동료들은 “연기 초딩”이라고 놀린다.

2003년 연극 ‘관객모독’ 공연 중 연출가가 직접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물을 끼얹는 모습. [중앙포토]

2003년 연극 ‘관객모독’ 공연 중 연출가가 직접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물을 끼얹는 모습. [중앙포토]

이들이 꾸미는 무대는 어떨까. 언어극의 새 지평을 연 만큼 언어유희가 펼쳐진다. 한 명은 부자지간 관객을 보더니 “왜 남이랑 연극 보러 왔냐”고 따진다. 또 한 명은 행색이 남루한 관객에게 “가난하면 연극 볼 자유가 없다”고 혼낸다. 관객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다. 수위도 넘나든다. 한 명은 “바지 한 번 내릴까”라고 관객을 놀라게 하더니 누나로 보이는 관객에게는 “확 끄는데”라고 저돌적 멘트를 날린다. 언어극이라지만 파격적 몸짓도 빼놓지 않는다. 또 한 명은 모든 관객과 눈맞춤 하려고 도리도리를 무한 반복한다. 자기 대사를 이해 못 하는 관객이 있다 싶으면 알아들을 때까지 면전에서 삿대질한다. 이 연극에는 카메오도 출연한다. 관객에게 다가가 “내 눈을 바라봐~ 넌 행복해지고~”라고 외친다. 축지법과 공중부양 기술로 극장을 휘젓기도 한다. 어느덧 마니아 관객도 생겨서 “카메오를 정식 배우로 캐스팅하라”고 요구한다.

아, 그런데 이 연극은 도무지 무대에 올릴 수 없을 것 같다. 부조리극의 극단을 보는 것 같다. 아무리 ‘관객모독’이라지만 부끄러움은 누구 몫이란 말인가. 참고로 페터 한트케는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무대 위의 배우를 구경하러 온 관객을 비판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관객모독’의 핵심 메시지는 ‘관객이여, 주체가 돼라’다. 이 글을 쓴 목적도 같다. ‘유권자여, 주체가 돼라. 안 그러면 물벼락 맞는 건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