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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여온' 정부법안 처리용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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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부겸 열린우리당 의원이 9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정부질문을 하는 모습이 대형 화면에 나오고 있다. 김 의원은 정부의 정책 실패를 거론하며 거국 중립내각을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오종택 기자

청와대가 9일 정치권의 거국 중립내각 구성 요구에 "그럴 용의가 있다"고 대답했다.

거국 중립내각은 임기 말 대통령이 요구받아온 단골 메뉴다. 김영삼 대통령 때 그랬고, 김대중 대통령 때도 그랬다. 하지만 정작 실현된 적은 거의 없다. 1992년 10월 노태우 정부 때 대선을 두 달 남겨놓고 현승종 총리를 중심으로 한 중립내각이 탄생했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런 만큼 "거국 중립내각이든 관리 내각이든 여야가 합의하면 받겠다"는 청와대의 역(逆) 제안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청와대는 왜 이런 제안을 하고 나섰을까.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정치권의 요구에 대답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관리형 내각을 요구한 데 이어 9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열린우리당의 김부겸.최규식 의원 등이 거국 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한 점 등을 들었다. 이 관계자는 "이제는 국회가 대답할 차례"라고 했다.

이번 제안에는 청와대 내부의 필요성도 감안됐다. 윤태영 대변인은 "국회가 정쟁이나 대통령 흔들기만 하면서 주요 국정과제의 처리를 계속 방기하고 있다"며 "이런 과제들을 정상적으로 처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검토된 것"이라고 말했다.

임기 말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는 요즘 청와대에선 초조감이 감지된다. 북핵 실험 여파로 외교안보 정책은 여론의 도마에 올라 있다.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당 내에서조차 '이러다간 임기 후 노무현 정부가 무엇을 성과로 내세울지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는 이번 정기국회에 계류된 253개 정부 제출법안에 주목하고 있다. 국방개혁안, 사법개혁안, 비정규직 법안 등 대부분 역점을 둬온 개혁 법안들이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국회가 정쟁에만 몰두해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 결과적으로 청와대는 민생 개혁 법안들의 처리를 담보받는 조건으로 중립내각을 받을 수 있다고 역공한 셈이다.

그러나 중립내각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우선 청와대가 붙인 조건들이 까다롭다. 정기국회 쟁점 법안들을 여야 합의로 처리하라는 요구를 한나라당이 받기는 어렵다.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이해집단들의 표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학법 등 민감한 법안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조건인 중립내각 구성안도 여야가 합의하기는 쉽지 않다. 청와대 관계자들조차 "실현성이 있겠느냐"고 할 정도다. 뿐만이 아니다. 당의 진로를 놓고 백가쟁명식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열린우리당이 통일된 의견을 내 야당과의 논의에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야당은 청와대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민주당 등은 "먼저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탈당에 대해 청와대는 고개를 젓고 있다. 한 핵심 인사는 "대통령은 탈당할 생각이 없다"고도 못박았다. 대통령이 탈당하지 않는 상황에서 거국 중립내각의 진정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 윤 대변인은 "직접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이번 제안은 지난해 논란이 됐다가 폐기된 대연정의 전철을 다시 밟을 가능성이 크다.

박승희 기자<pmaster@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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