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서 판문점까지…이찬삼특파원 한달 취재기(다시 가본 북한: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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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TV뉴스 모두 녹화해 방송/방송국 창설 “김정일공로”강조/개성 송출은 대남방송이 목적/월북청년 회견 등 선전물 수시로 재방
북한사람들의 TV시청률은 대단하다.
영화나 교예(서커스)등이 인기를 얻고 있지만 안방에서 TV보는 것을 큰 낙으로 삼기 때문이다.
좀처럼 대외에 공개하지 않는 「조선중앙 때레비죤회관」을 취재할 기회를 얻었다.
9월2일 오후 4시 대동강 건너 동평양 한적한 곳에 위치한 방송국을 찾아가보니 그곳은 북한의 어느기관보다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기자를 안내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참사관이 미리 연락을 취했을 뿐 아니라,평범한 사람은 엄두도 못낼 벤츠승용차를 타고 갔음에도 정문을 지키는 무장병사는 정지 신호를 보낸후 다가와 무조건 신분증 제시부터 요구했다.
동행한 참사관의 설명은 아예 귀담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방송국 취재를 신청했을때 「외부건물 사진촬영금지」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례히 행동하는 무장병사앞에서 참사관도 쩔쩔맸다.
○무장군인이 경비
방송국은 서울 MBC청사 정도의 규모였으나 간판 등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조선방송위원회 김청일 프로교환처장(54)의 안내로 접견실에서 브리핑을 받을 때 『삼엄한 경비를 하는 이유와 외부촬영을 금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고 물었더니 『남조선 특공대가 방송회관을 노린다는 정보가 있어서…』라고 답변했다.
『1963년 3월3일에 첫전파를 날렸습니다』고 말한 김처장은 『선생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지만 창설을 준비할때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 때레비창설 성원으로 직접 카메라 렌즈를 조립하곤 하시었단 말입니다』고 김정일을 치켜세웠다.
그는 이어 『지도자 동지께서 시험발사이후에도 무려 1백20차례나 지도사업(훈시)을 주시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김정일의 공로로 이처럼 훌륭한 시설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63년도에 흑색(흑백)으로 시작한 중앙TV는 71년부터 천연색으로 바꿨으며 「모란봉 탑」(송신소)에서 전국 각 도청소재지 중계탑으로 날려(송출) 방방곡곡에서 TV를 볼 수 있다는 것.
『위대한 수령님께서 6차당대회에서 「전국의 때레비죤화」를 교시하신 이후 이젠 때레비 없는 곳은 없게 됐단 말입니다』라고 말한 그는 평일 매일오후 6시부터 11시,농민의 날인 1일,11일,21일고 주말은 오전 9시부터 정오,오후 3시부터 11시까지 방영한다고 알려주었다.
○평일 5시간 방영
평양에 있는 중앙 TV와 사회문화 TV(일명 만수대 TV)가 있으며 지방국으로는 유일하게 개성 TV가 있다고 했는데 개성의 경우 서울과 가까운 점을 이용,대남방송이 목적인 것 같았다.
인구 10만명 정도인 개성이외엔 모두 평양에서 송출하는 프로가 전국에 방송되는 점이 특이했다.
김처장은 이점에 대해 기자의 질문을 받자 절대로 대남방송용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얼마전 모스크바를 갔을 때 남조선 대학생들과 인솔 교원(교수)을 만났는데 그들이 나의 가슴팍에 안기며 북조선의 때레비 프로인 「사회문화생활」을 보고 탐구생각이 났었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화국 때레비를 시청해도 일없는가,반공법으로 가두지 않는가 했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가만히 보지요 합니다』라며 북한TV프로가 남한까지 송출되고 있음을 스스로 시인했다. 개성TV가 PAL방식을 쓰는 중앙TV나 사회문화TV와 달리 남한과 같은 NTSC방식을 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남방송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때레비종사자 1천명을 포함해 평양 라지오·중앙 라지오·대외방송(국제)라지오 등에서 모두 3천명이 일한다』고 방송종사자규모를 소개한 김처장은 「보도 촬영장(뉴스스튜디오)」을 비롯,「때레비 소설(연속극)촬영장」과 녹음실·주조정실 등을 두루 보여 주었다.
놀랍게도 「6시보도」와 「9시보도」모두 생방송 진행이 아닌 녹화를 하고 있었다.
김처장은 뉴스녹화중인 방으로 불쑥 들어가 녹화를 중단시키고 『어이,남조선 중앙일보 기자선생이 오셨어』라고 소리쳤다.
방송원(앵커)유동호씨(38)는 판문점·북한의 범민족대회중 만나 인사를 나눈 구면이라 반갑게 맞았으나 여성앵커 이춘희씨는 일을 방해받아서인지 신경질을 냈다.
이들이 진행하는 뉴스내용 가운데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는 것도 있었다.
『파쇼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삶이 고통스러워질수록 친애하는 김정일동지에 대한 남조선 인민들의 그리움은 더욱더 절절해지고 있습니다.
(중략)서울대학교의 한 역사학 교수는 얼마전 자기집을 찾아와 남조선 중앙일보에 모셔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사진을 직접뵈옵고 기쁨을 금치못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문 신뢰 절대적
그 기쁨은 제군들의 경우만이 아니다. 친애하는 김정일 선생님의 사진을 접한 기쁨은 마치 광복직후 김일성 장군님의 서울입성을 애타게 기다리며 감격과 환희에 휩싸여 들끓던 그때처럼 온국민의 마음속에 차넘치고 있다.(중략) 위인에게는 반드시 추앙심이 따르는 법이다…』등을 중요 뉴스로 녹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내용은 로동신문에도 자주 등장했는데 기자가 만난 북한사람들은 신문·방송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신문에 났는데 엉터리 일수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들을 했다.
김처장은 『때레비죤 프로라는 것이 밑빠진 항아리에 물붓는 격』이라며 『아무리 열심히 좋은 프로를 만들어도 시청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단 말입니다. 시청자들이 재미없다는 의견제기를 많이해와 골머리가 아픕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럴때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좋은 안(아이디어)을 보내주셔서 활기를 찾는단 말입니다』라며 김일성 주석보다는 김정일에 대한 선전에 더욱 열을 올렸다.
북한 취재기간중 보아온 중앙TV는 「호출부호」나 프로그램 사이의 「브리지」는 전혀 쓰지 않았으며 정해진 시간에 관계없이 늦거나 또는 빠른시각에 방송프로를 내보내기도 하고 양해멘트없이 「해외동포들을 뜨겁게 맞아주시어」(문익환·임수경 등의 김일성 접견 등)월북청년의 기자회견 등을 여러차례 수시로 재방송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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