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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호동의 실크로드에 길을 묻다

13세기 몽골제국의 등장, 21세기 지구촌을 예감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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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세계사의 탄생

1402년, 조선 태종 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 疆理歷代國都之圖)’. 약칭 ‘혼일강리도’다. 중국 명나라에서 입수한 지도, 일본의 지도, 조선 본국의 지도를 합성해 만들었다. [중앙포토]

1402년, 조선 태종 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 疆理歷代國都之圖)’. 약칭 ‘혼일강리도’다. 중국 명나라에서 입수한 지도, 일본의 지도, 조선 본국의 지도를 합성해 만들었다. [중앙포토]

세계사를 돌아볼 때 실크로드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통용됐다. 일단 협의와 광의, 두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가장 이 말의 기원에 충실한, 즉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가 있다. 문자 그대로 고대 이래로 중국산 비단 혹은 더 나가 아시아 동부 지역의 물산이 중앙아시아 사막 지역을 거쳐서 인도나 서아시아, 더 멀리 지중해까지 전달됐던 교역 루트를 지칭한다.

좀 더 의미가 넓은 실크로드도 있다. 비단과 상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사회·문화적 요소, 이를테면 인적·문화적 왕래도 교류 대상에 포함됐다. 교류 루트 역시 사막은 물론 북방의 초원과 남방의 해상까지 아울렀다. 오늘날 학계는 물론 일반인이 이해하는 실크로드는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문화·경제 교류로 세계가 하나로
개별 지역 넘어서 변화·발전해와

동서 연결한 여행기·지도 잇따라
근대 유럽도 몽골이 닦은 길 이용

‘세계사 = 유럽사’ 고정관념 씻을 때
지구촌은 서로 영향받으며 발전

실크로드는 이를테면 문명의 대동맥이었다. 근대 이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북반구, 즉 아프로-유라시아 세계에 속한 여러 지역 사이의 교류와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만약 그 옛날 곳곳의 지역·문화에 새 피를 전달해준 대동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계사는 과연 지금 어떤 모습이 됐을까. 분명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매우 달랐을 게 확실하다.

예를 들어 중국이나 이란 혹은 유럽 등이 외부 세계와 전혀 접촉하지 않고, 각자 닫히고 고립된 자기만의 세계 속에 갇혀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세계의 역사(world’s history)’는 있었을지언정 ‘세계사(world history)’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막·초원·바닷길 모두 포함한 개념

이란 출신 라시드 앗딘의 『집사(集史)』 나오는 삽화. ‘마귀에게 과일을 바치는 석가모니’. [사진 할릴리 컬렉션]

이란 출신 라시드 앗딘의 『집사(集史)』 나오는 삽화. ‘마귀에게 과일을 바치는 석가모니’. [사진 할릴리 컬렉션]

우리가 이제까지 읽어왔고 또 안다고 생각해온 세계사는 사실상 ‘세계의 역사’이지 ‘세계사’가 아니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에 배운 세계사 교과서는 대체로 문명의 4대 발상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세계 주요 문명의 역사를 각각 별도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대부분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이 세계를 석권하면서 ‘세계사’가 탄생한 것으로 배웠다. ‘근대’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본격적이고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 관념은 이제 마땅히 수정돼야 한다.

오늘날 ‘지구촌’이란 용어는 상식이 됐다. 더는 ‘지구’ 전체를 여러 곳으로 분리하고, 개별 지역을 독립적인 공간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글로벌’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 실제로 2007년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위기는 전 세계에 심대한 충격을 안겼고, 2020년 중국에서 터져 나온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벌써 2년째 전 세계를 마비시키고 있다. 어느 한 곳에서 발생한 사건이 얼마나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확산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근대 이전의 세계사를 살펴보자. 과거 어떤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이 금융위기나 코로나19처럼 지구촌 전체에 충격과 변화를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물론 그 속도는 좀 더 느리고 범위도 제한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사건과 변화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5000년 전 인도-유러피언의 대이동

‘네보산에서 영면에 든 모세’다. [사진 할릴리 컬렉션]

‘네보산에서 영면에 든 모세’다. [사진 할릴리 컬렉션]

지금부터 5000년 전 유라시아 서부 초원에서 시작된 인도-유러피언의 이동을 따라가 보자. 그들의 이주는  구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유럽과 인도·이란 등지의 민족 구성을 결정짓는 사건이 됐으며, 고대 동부 유라시아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흑사병도 마찬가지다. 14세기 전반 중앙아시아 어느 곳에선가 시작된 이 전염병 역시 전 세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그에 따른 한 역사적 격변을 아직도 정확하고 충분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심각한 여파를 미쳤다.

세계사의 ‘세계성’은 유럽의 등장으로 근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상고 시대 이래로 실크로드는 아프로-유라시아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엮은 동아줄이었고, 아메리카 신대륙을 그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콜럼버스가 읽고 메모했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스페인 세비야 소재 콜럼버스 도서관 소장품이다.

콜럼버스가 읽고 메모했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스페인 세비야 소재 콜럼버스 도서관 소장품이다.

이제까지 통상적인 세계사 서술 방식에서 볼 때 유럽의 근대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드디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됐고,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탄생했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실은 그 전에도 세계사는 엄연히 존재했다. 유럽의 근대가 바꾸어 놓은 변화는 ‘그 전에 없었던’ 세계사가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기왕에 있었던’ 세계사가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사로 재편됐다는 사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세계사의 흐름을 돌이켜 볼 때 근대 유럽 이전에는 그 주도권이 어느 한 지역, 또는 한 민족에 제한된 것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분산돼 있으면서도 세력균형을 이뤘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지역적인 편차가 존재했고, 시대에 따라 특정 지역이 보다 더 우세하고 팽창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균형이 깨진 결정적 전환점이 있었다. 바로 13세기 몽골제국의 등장이다. 몽골은 서부 유럽과 인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유라시아 전체를 통합한, 문자 그대로 ‘세계제국’을 수립했다. 그 전에도 알렉산더의 정복, 이슬람의 팽창 등에 힘입어 거대 제국이 일어난 적이 있었지만, 그 제국의 범위와 영향력은 몽골보다 매우 한정됐다.

몽골제국은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실크로드를 통한 경제·문화 교류를 극대화하는 장을 마련했다. 만약 ‘몽골의 시대’가 없었다면 ‘유럽의 근대’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몽골의 시대에 일어난 그 무엇이 ‘유럽의 근대’를 가져오게 한 것일까.

성경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유럽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된 콜럼버스 초상.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된 콜럼버스 초상.

가장 중요한 것은 아프로-유라시아라는 광대한 지역을 하나의 세계로 생각하게 됐다는 데 있다. 즉 그 전에도 인류는 하나의 세계 속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이 살고 있던 그 세계가 하나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몽골제국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세계사라는 인식을 탄생하게 했다. 물론 이를 현실화한 것은 몽골 시대에 이뤄진 인적·물적 대교류였다. 수많은 사람이 유라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을 왕래했고, 그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기록으로 남겼다. 베네치아 출신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 모로코인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가 대표적 사례다. 수많은 중국인 역시 서아시아로 갔고 그곳에 체류하면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이란의 역사서들에는 그곳에서 활동하던 많은 ‘키타이인’, 즉 중국인들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세계사와 세계지도도 만들어졌다. 이란 출신의 라시드 앗 딘은 몽골 세계제국의 역사를 집필하면서, 동시에 중국·인도·유럽·투르크·유대인의 역사도 같은 책 안에 서술했다. 말 그대로 역사상 ‘최초의 세계사’가 태어난  셈이다.

그런가 하면 나중에 대원제국의 군주 쿠빌라이는 자말 앗 딘이라는 지리학자에게 세계지도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물은 현재 사라졌지만, 그것을 활용한 지도들이 중국과 조선에서 잇따라 제작됐다.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와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가 그것이다. 유럽에서도 중세의 성경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근대적 세계지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카탈루냐 지도’를 선보였다.

물론 서유럽은 몽골제국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몽골인이 닦아놓은 ‘몽골의 세계’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그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베네치아나 제노아 출신 상인들의 교역 무대는 지중해를 넘어서 유라시아 전역으로 뻗쳐 나갔다. 피렌체 출신의 페골로티가 쓴  『상업실무서』라는 책을 보면 흑해에서부터 ‘키타이’ 중국까지 가는 여행 루트가 자세히 묘사돼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제노아 출신이라는 사실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는 마르코 폴로의 글을 탐독했으며 몽골의 대칸이 지배하는 ‘인도(India)’, 즉 동방으로 가려고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몽골의 시대에 실크로드가 만들어 놓은 세계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