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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도 아베가 막았는데..日 '반대'에 더 멀어지는 종전선언

중앙일보

입력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정책에서 한ㆍ미ㆍ일의 조율된 입장을 강조하는 가운데 문재인 정부가 임기 말 드라이브를 거는 종전선언을 둘러싸고 한ㆍ일 간 이견이 부각되고 있다. 일본은 종전선언의 당사국은 아니지만, 아베 내각 당시인 지난 2018년에도 반대 입장을 밝히며 관련 논의에 제동을 걸었다.

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한ㆍ미ㆍ일 북핵 수석대표 협의를 하는 모습. 외교부.

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한ㆍ미ㆍ일 북핵 수석대표 협의를 하는 모습. 외교부.

①종전선언 꾸준히 회의적인 日

교도통신은 지난 6일 일본이 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ㆍ미ㆍ일 3국 북핵 수석대표 회동에서 종전선언에 대해 '시기상조'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권 출범 후 처음 열린 3국 회동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후나코시 다케히로(船越健裕) 일본 외무성 아시아ㆍ대양주국장이 북한이 미사일 실험을 반복한다는 이유 등을 들며 종전선언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취지다. 당시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해당 보도와 관련, 일본 정부 부대변인인 이소자키 요시히코(磯崎仁彦) 관방부(副)장관은 8일 기자회견에서 "상세한 내용은 외교상 문제로 밝힐 수 없다"며 "북한 관련 대응은 한ㆍ미ㆍ일이 긴밀히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3국 공조를 강조하면서도 부인은 하지 않은 것이다.

종전선언에 대한 일본의 반발은 아베 내각 때도 비슷했다. 지난해 발간된 존 볼턴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2018년 6월 북ㆍ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검토했지만 당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반대했고 결국 무산됐다.

볼턴 전 보좌관은 회고록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종전선언에 기대감을 가졌지만 일본은 불편한 기색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북ㆍ미 정상회담 직전 아베 전 총리가 백악관을 찾아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북한에게 양보하지 말라'고 직접 설득했다"고도 밝혔다.

종전선언을 비롯한 대북 관여 정책에 회의적인 동시에 대북 제재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은 아베-스가-기시다 내각 내내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마키노 요시히로(牧野愛博) 아사히신문 기자는 지난 3일 자유아시아방송(RFA)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는 (한ㆍ미가) 종전선언을 검토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며, 종전선언에 대한 반대 입장을 되풀이했다"고 말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EPA.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EPA.

②왜 자꾸 제동 거나?

우선 일본 정부는 자국 대북 정책의 1순위 과제인 납북자 문제가 해결되기 전 전쟁 종료를 선언해선 안 된다고 판단하는 측면이 크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달 취임 후 첫 국회 연설에서 "북한 납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모든 납북자의 조속한 귀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를 위해) 조건 없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직접 대면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미ㆍ일은 납북자 문제 해결을 한 목소리로 촉구했다. 지난 4월 미ㆍ일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바이든 대통령은 일본인 납북자 문제의 즉각적 해결을 위한 미국의 약속을 재확인했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기회가 될 때마다 납북자 문제 관련 미국의 지지를 구해온 일본이 여기서 진전을 볼 수 있다는 확신 없이 남ㆍ북ㆍ미ㆍ중만 모여 종전선언을 하는 걸 경계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본 입장에선 한국 전쟁 이후 유일하게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한 상대가 북한으로, 과거부터 북핵 관련 협의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 꾸준히 노력해왔다"며 "따라서 납북자 문제에 대한 해결이 난망한 상황에서 일본을 논의에서 배제한 채 선포한 종전선언으로 전후 체제에 영향을 주는 걸 막으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한국의 대북 정책에 동조할 만한 요인이나 선의로 지원할 신뢰도 사라졌단 지적도 나온다. 남북 대화가 원활하게 진행되던 지난 2018년엔 일본이 납북자 문제 해결이나 북ㆍ일 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해 한국의 중재 역할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북 간 교착 국면이 이어지자 일본이 자연스럽게 자국의 대북 정책 운용 과정에서 한국의 효용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우려다. 또 바이든 행정부 들어 미·일 동맹이 한층 견고해진 만큼 일본이 북한 문제의 '키 플레이어'로 움직이기 위해 굳이 한국의 지지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과거사 문제에서 촉발된 법원 판결과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등으로 인해 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냉랭해졌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현 상황에서 우리의 대북 정책에 일본이 힘을 실어주기를 기대하긴 어렵다"며 "만약 한ㆍ미 양국이라도 조율된 입장으로 종전선언을 추진한다면 일본이 따라올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은 한ㆍ미 간에 그런 공감대나 추진 동력이 없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 정부도 대북 정책과 관련해 일본을 제대로 설득하려는 노력보다는 '패싱'(passing) 하려는 경향이 짙다"고 지적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연합뉴스.

③美ㆍ日 우려에도 포기 모르는 韓

이처럼 정부가 미국과 일본의 지지를 확실히 얻지 못하며 당초 종전선언 구상 자체가 무리수였단 비판도 제기된다. 특히 종전선언과 관련한 북한의 진의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한 채, 북한이 대외적으로 표명한 입장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지난 9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언급했다는 점을 북한의 전향적인 신호로 해석해 설득전에 활용하고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지난 3일 문재인 대통령의 유럽 순방 중 헝가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김 위원장이 대외적으로 종전선언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의미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당시 연설에서 김 위원장은 '종전선언에 앞서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와 이중기준 철폐가 이뤄져야 한다'고 선결조건을 내걸면서 사실상 종전선언을 실현 불가능한 수준의 과제로 끌어올렸다.

일각에선 정부가 임기 내 종전선언 달성이 어렵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그 필요성을 국내외 사방에 선전함으로써 북한이 대선을 앞두고 극단적인 도발에 나설 가능성을 차단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는 최근 북한이 약 4년 동안 핵ㆍ미사일 모라토리엄(장거리 탄도미사일과 핵실험 중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종전선언 등 보상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면서, 북한이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에 해당하는 미사일 발사를 감행해도 '도발'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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