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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외조부가 키우던 딸 강제로 보육원에…이 아빠 유괴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용우의 갑을전쟁(43)

우리 형법에 미성년자의 약취, 유인을 처벌하는 죄가 있습니다(형법 제287조). 쉽게 말하면 미성년자를 유괴하는 것인데요. 유인은 속이거나 유혹으로, 약취는 미성년자의 의사에 반해 보호 관계로부터 범인의 지배를 옮기는 행위, 즉 납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괴는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흉악범이 자녀를 유괴 후 몸값을 요구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심지어 부모라도, 보호 감독자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자녀를 함부로 데리고 오면 미성년자 약취, 유인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보통 부모가 이혼하거나 부모 중 일방이 사망한 후 상속 문제가 걸려 있는 경우에도 발생하는데요. 엄마가 교통사고로 사망 후 외조부가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빠와 외조부 사이에 교통사고 배상금 분쟁이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녀가 거부하는데도 강제로 차에 태워 할아버지에게 간다고 거짓말을 속이고 보육원에 데려가 피해자의 수용문제를 상담한 다음 개 사육장에서 잠을 재운 후 다른 아동복지상담소에 데리고 간 아빠에게 미성년자 약취·유인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대법원 2008. 1. 31 선고 2007도8011 판결). 이때 아빠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부부가 공동으로 양육하는 자녀를 일방적으로 해외로 데리고 간 것이 미성년자 약취죄, 즉 유괴범이 되는지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사건도 있다. [사진 flickr]

부부가 공동으로 양육하는 자녀를 일방적으로 해외로 데리고 간 것이 미성년자 약취죄, 즉 유괴범이 되는지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사건도 있다. [사진 flickr]

그런데 부부 일방이 일방적으로 자녀를 데리고 간다고 꼭 유괴범이 되는 건 아닙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이 수원에서 천안행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외박하게 되자, 남편으로부터 ‘며칠 동안 집을 나가라’라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해 13개월 된 갓난아이를 데리고 베트남으로 떠났다가 양육비를 벌기 위해 혼자 다시 입국한 후 남편과 협의이혼을 하면서 양육자로 지정된 사례가 있었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베트남 아내를 미성년자 약취죄로 고소했고요. 이 경우처럼 당시 부부가 공동으로 양육하는 자녀를 일방적으로 해외로 데리고 간 것이 미성년자 약취죄, 즉 유괴범이 되는지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12명의 대법관이 치열한 토론을 했고, 결국 베트남 여성은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대법원 2013. 6. 20 선고 2010도14328 전원합의체 판결). 참고로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최초로 공개변론을 생중계한 사건으로 유명합니다.

대법원 다수의견은 베트남 여성이 자녀를 데리고 베트남으로 떠난 행위는 실력을 행사해 평온하던 종전의 보호·양육 상태로부터 이탈시킨 것이라기보다 친권자인 엄마로서 출생 이후 줄곧 맡아왔던 자녀에 대한 보호·양육을 계속 유지한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5명의 대법관은 부모 중 일방이 상대방과 동거하며 공동으로 보호·양육하던 유아를 국외로 데리고 나갔다면 ‘사실상의 힘’을 수단으로 사용해 유아에 대한 지배를 옮긴 것이고 유괴로 보아야 한다고 반대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반대의견은 혼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으로 친권을 행사하는 것인데,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친권행사를 배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에서는 비슷한 사안에서는 달리 판단했습니다. 한국인 남성은 프랑스 여성과 결혼 후 프랑스에서 거주하다가 자녀를 출산하였지만 한국으로 귀국 후 별거를 시작했습니다, 자녀와 프랑스에 남은 여성은 프랑스 법원에 이혼 청구를 했고, 프랑스 법원은 자녀의 거주지를 엄마의 거주지로 정하고 아빠가 한 달간 면접교섭을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임시조치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면접교섭 기간을 약속하며 자녀를 한국으로 데려왔습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자녀를 프랑스로 데려다주지 않았고, 급기야 엄마와의 연락마저 끊어버렸습니다. 엄마는 프랑스 경찰에 남편을 고소하는 한편 한국 법원에도 친권자 및 양육자 지정, 자녀의 인도 등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한국 법원 역시 자녀의 양육자로 엄마를 지정하고 아빠에게 자녀의 인도를 명령했지만, 아빠는 끝내 불응했고 결국 미성년자약취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자녀는 그동안 프랑스어를 상당 부분 잊어버렸고 한국 생활에 익숙해진 탓에 프랑스로의 입국을 거부했습니다만, 아빠는 형사재판을 받던 중 끝내 자녀를 프랑스에 있는 엄마에게 인도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때는 이미 아빠가 자녀를 데리고 온 지 5년이나 지난 시점이었고, 자녀에게 프랑스는 낯선 곳이 된 후입니다.

무죄를 선고한 베트남 여성의 사건과는 달리, 대법원은 한국인 아빠에게 미성년자 약취죄로 징역 1년의 선고를 유예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대법원 2021. 9. 9 선고 2019도16421 판결). 선고유예는 2년간 다른 형을 선고받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면소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인데요, 정상 참작할 여지가 아주 많을 경우 법원에서 특별히 선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부에 대한 처벌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이미 프랑스 법원과 수원지방법원이 엄마를 양육자로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인도를 거부한 것은 자녀의 복리를 침해한 것으로 봤습니다. 특히 자녀는 5살의 나이에 말조차 잘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친밀감을 형성하지 못했던 아빠와 살게 되었지요. 기존에 유대관계가 있던 엄마와 연락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된 부모와의 관계 차단으로 결국 프랑스에서의 생활 및 보호자인 엄마와 관계에서 완전히 이탈되었습니다. 법원은 자녀가 프랑스어를 잊어버리고 모의 유대관계까지 잃어버리게 되어 자녀의 복리를 침해한다고 본 것입니다. 즉 베트남 여성의 경우 주된 양육자였고 협의이혼 절차에서도 양육자로 지정된 점에서 유괴가 아니라고 보았지만, 한국인 남성의 경우 주된 양육자도 아니고 타방이 양육자로 지정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자녀를 한국으로 데리고 온 경우라 달랐고, 결국 유괴로 선고받은 겁니다.

유괴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심지어 부모라도 보호 감독자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자녀를 함부로 데리고 오면 미성년자 약취, 유인죄가 될 수 있다. [사진 pxhere]

유괴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심지어 부모라도 보호 감독자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자녀를 함부로 데리고 오면 미성년자 약취, 유인죄가 될 수 있다. [사진 pxhere]

두 사례에서 보듯 국제결혼이 파탄나면 일방이 자녀를 자국으로 함부로 데리고 오는 경우는 많았습니다.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각국의 공조로 자녀를 신속하게 인도하기 위해 국제아동탈취협약을 두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도 2012년 가입하고 ‘헤이그 국제아동탈취협약 이행에 관한 법률’을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프랑스 아내가 한국법원에 한국인 남편에게 자녀의 인도를 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위 법률에 근거한 겁니다.

헤이그국제아동탈취협약은 기존 가입국이 신규 가입국의 가입을 수락해야 양국 간 발효됩니다. 올해 1월 기준으로 기존 가입국 101개국 중 63개국이 우리나라 가입을 수락하였고, 수락국의 확대를 추진 중이라 합니다. 다만 우리나라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이 많은 중국,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는 아쉽게도 헤이그 국제아동탈취협약에 가입하지 않아 자녀를 함부로 데리고 갈 경우에 그 인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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